북한을 떠나 낯선 땅인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에게 첫 직장은 단순한 일터가 아닙니다. 생존을 넘어 자아를 찾고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아가는 발판이 될 텐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탈북민 김고은 씨’의 첫 번째 얘기 전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마라탕 가게는 김 씨가 처음 시작한 사업이자, 꿈을 현실로 만든 공간이기도 한데요. 사실 김 씨는 이 가게를 운영하기 전 한국에서의 첫 직장 생활을 4년 동안 이어왔다고 합니다. 먼저 한국에서의 초기 정착 생활부터 들어볼까요? 김고은 씨입니다.
[녹취: 김고은 씨] "제가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 나온 게 (20)19년 3월에 나왔습니다. 나와서 6개월은 저희가 교육받는 거 있거든요. 그래서 하나센터에서 교육받고 6개월 되는 달에 바로 취업해서 4년 동안 '백의민족'에서 독거 어르신들 대상으로 저소득층 대상으로 하는 세탁 서비스업 이거를 4년 동안 했거든요. 그러고 23년도에 퇴사하고 식당을 오픈했어요.”
김고은 씨의 첫 직장은 찾아가는 침구류 세탁 서비스업을 하는 ‘백의민족’이었는데요. 서울시 및 자치구와 협력해 세탁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녹취: 김고은 씨] "주로 동사무소들에서 저소득층이나 독거 어르신들 뭐 자녀들이 없으신 분들에 대한, 그분들은 세탁이 어려우시니까 그분들에 대한 자료를 저희한테 주시면 저희가 그분들 세탁물을 수거해서 당일 세탁 그러니까 세탁하고 건조까지 해서 가져다드리는 서비스업입니다. 셀프 빨래방 있어서 빨아서 바로 거기서 건조해서 주로 이불을 빨아다 드리는 그런 일을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운전이다 보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거하고 운전해서 가야 하니까 그게 재밌었던 것 같아요. 차를 대표님이 사이즈별로 갖다주셔서 제가 운전을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김 씨는 직접 운전을 하며 이불을 수거하고 가져다드리는 일을 한 건데요. 특히 김 씨는 운전을 좋아했기에 좋아하는 차를 마음껏 몰 수 있는 이 일이 참 즐거웠다고 합니다.
[녹취: 김고은 씨] "하나센터의 전문 취업을 담당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그분들이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거기에 대해 소개해 주시거든요. 면접도 같이 봐주시고 어떤 일 이런 거 다 찾아주셔서 그분들이 소개해 주신 거 면접 봐서 바로 합격했습니다. 근데 대표님이 되게 쿨하게 차를 맡기시면서 한 달을 그냥 알아서 다녀 보셔라, 그러면서 이따금 주소를 하나씩 주시는 거예요. 여기 가서 이 주소 확인하고 오세요. 하면은 처음에는 고속도로를 탔는데 갓길을 못 빠져서 40분 가는 데를 막 2시간 돌았어요. 그렇게 서울 시내를 돌면서 길도 익힌 것 같고 그다음부터는 마포구를 다니면서 주로 마포랑 영등포랑 강서 이쪽에 다녔습니다.”
김 씨가 운전면허를 취득하긴 했지만, 처음엔 운전이 능숙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그렇기에 자신을 믿고 맡겨준 이광훈 대표 덕분에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고은 씨] "대표님이 되게 용감하셨던 것 같아요. 면허를 따고 한 3개월 됐거든요. 장롱면허나 거의 같은데 어쨌든 차를 맡겨 주시고 아직 내비(navigation·지도를 보여 주거나 지름길을 찾아주는 프로그램) 볼 줄 모르고 길 찾을 때 전화하면 바로 응대해 주시고 되게 많이 도와주셨던 것 같아요. 부천에 그 센터 하나 있어서 제가 입사 초기에는 부천에 있는 무슨 택배하는 곳이었는데 가방 세척했거든요. 가방 세척하는 그 길을 돌아보는데 대표님이 '그러면 운전해 보세요. 내가 한번 탑승해 볼게요.' 하고 가신 거예요. 근데 딱 고속도로 올라서는 길에서 나름 사정없이 끼어드는 거죠. 대표님이 그날 '청심환 어디 없어요?' 그다음부터는 같이 안 타시더라고요. '혼자서 알아서 가세요.' 이렇게...”
입사 초기의 다양한 경험들은 김 씨가 업무에 빠르게 적응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고요. 이후 김 씨는 운전 업무뿐만 아닌 중요한 회의 자리까지 함께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 대표의 적극적인 지원은 업무에 대한 자신감과 책임감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녹취: 김고은 씨] "정착 잘한 거는 이광훈 대표님이 공로가 많으세요. 많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그 주민센터에서랑 회의하시는 거 있거든요. 6개월에 한 번 이렇게 세탁만이 아니고, 도시락 해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집수리해 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이렇게 담당이 다 있잖아요. 이분들이 한 3개월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씩 회의하실 때 나를 꼭 데리고 가시거든요. '이분이 저희 담당자입니다.'하고 데리고 가셔서 나한테 맡기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책임을 내가 다 안고 가야 하니까 '아, 이거를 정신 차리고 가야 하겠구나.' 이렇게 해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사실 김 씨가 하나원을 나오고 하나센터에서 교육을 받은 뒤 바로 취업했기에 탈북민 가운데서도 사회생활을 빨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운전면허는 언제 취득한 걸까요?
[녹취: 김고은 씨] "하나원에 있을 때는 여러 가지 직업에 대한 체험 프로그램이 잘 됐어요. 운전면허 선생님이 강의해 주시면 그 안에서 시험 볼 수 있거든요. 필기시험, 바로 필기 합격했고 커피 바리스타라고 그것도 체험해 봤고 여러 가지 직업에 대한 소개를 잘해 주셔서 거기서 '아, 나는 운전을 해야겠다.' 하나원 나와서 그 날짜가 있거든요. 언제까지 이거를 시험봐야 이게 효력을 본다고 해서 그때 나오면서 바로 운전면허 시험 봤고 도로 주행도 바로 합격했고...”
한국에서 운전면허를 취득한 건 김 씨에게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으로 차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신분 문제로 운전을 꿈꿀 수 없었기 때문이죠.
[녹취: 김고은 씨] "저희 아빠가 운전직을 하셔서 차를 좋아는 했거든요. 어릴 때부터 했는데 뭐 내가 뭐 여기까지 올 줄은 생각 못 했고 내가 차를 타 보겠어? 하고 짬짬이 아빠가 남들이 안 볼 때 살짝살짝 몇 번 태워줬거든요. 그래서 그 정도로 차에 대한 만족을 느꼈었는데 중국에서는 신분이 없으니까 그거는 꿈도 못 꾸는 일이고 한국에 딱 들어오니까 신분이 생기고 운전할 수 있다는 그게 저한테는 제일 큰 기쁨이었던 거 같아요.”
또한 김 씨는 특히 큰 차량을 운전할 때 느껴지는 시원한 시야와 안정감에 매력을 느낀다고 하는데요.
[녹취: 김고은 씨] "운전도 큰 차, 될수록 큰 차 그래서 지금도 버스나 덤프트럭이나 레미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서 항상 그쪽에 대한 취업 이런 걸 자꾸 찾아보고 있습니다. 탑차를 탔을 때랑 차마다 감정이 다르거든요. 차가 클수록 뭔가 이렇게 내려다보는 느낌, 시야가 확보되니까 좀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좀 큰 차, 높고 큰 차…”
김 씨는 2012년에 탈북해 중국에서 6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 과정에 중국인 남편을 만났고요. 2019년 함께 한국에 정착해, 현재는 4살이 된 자녀를 키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의민족’에서 일할 당시에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아와 직장 업무의 부담이 결국 자영업을 선택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녹취: 김고은 씨] "저희가 취업에 대한 취업장려금 같은 이게 4년이 만기거든요. 그래서 그것도 맞아떨어졌고 이것저것 기회가 돼서 직장을 그만두게 됐고 애가 있으니까 제일 일할 때 부담스러웠던 게 애가 갑자기 아프면 '저 일 못 할 것 같아요.'하면 모든 동사무소에 전화해서 그 동사무소 분들은 또 어르신들한테 전화해야 하고 어르신들이 안 되면 또 요양보호사분한테 전화해서 이걸 다 취소해야 하고 되게 번거로운 과정인데 아기는 아프고 어떻게 저는 할 수가 없고 좀 반복되다 보니까 그때는 아기가 어려서 그게 제일 미안한 거죠. 근데 자영업을 하면 시간은 그래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장점이 돼서...”
그러면서 김 씨는 한국에서 느낀 가장 큰 변화로 ‘자유’를 꼽았습니다. 자유가 있었기에 다른 직업에 도전할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며 결국 퇴사를 결심할 수 있었다는 건데요.
[녹취: 김고은 씨] "한국에 오기 잘한 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거고 저희는 솔직히 저기 있을 때는 일해도 월급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러다가 여기 와서 자기가 일한 것만큼 이게 되니까 그래서 저는 그게 좋았던 것 같아요. 중국에서는 거의 숨도 못 쉬고 살았던 것 같아요. 경찰을 보면 막 가다가 경찰이 오면 딱 눈이 마주치고 딱 돌아서 가는 그래서 지금도 한국에 와서도 경찰을 보면 몸이 반응해요. 지금도 경찰차가 온다고 그러면 차를 돌리는 거죠. 가다가 내가 차를 왜 돌렸지? 이렇게 지금도 몸이 반응해요.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고 참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의 자유로운 환경이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용기를 키워줬다는 김 씨. 지금은 자영업에 뛰어들어 마라탕 가게를 운영하며 바쁜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그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전해드리겠습니다.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