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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의 세상보기] 20년 만에 다시 찾은 도자 인생, ‘탈북민 이상철 도예가’


[탈북민의 세상보기] 20년 만에 다시 찾은 도자 인생, ‘탈북민 이상철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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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를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한 탈북민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어렸을 적부터 도예에 관심이 있었던 탈북민 이상철 씨인데요. 2004년 한국에 정착한 뒤에는 생업을 위해 도자 일을 잠시 멈췄지만, 지난해부터 이상철 씨에게 다시 작업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이상철 도예가’의 얘기 전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한 문화 포럼에서 탈북민 이상철 도예가가 자신의 탈북 계기를 전합니다.

이상철 작가는 북한 회령에서 태어나 25년 동안 회령 도자기 공장에서 근무했는데요. 이 작가는 지금껏 도자기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상철 도예가] "어릴 적부터 도예에 대해서 취미가 있었고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취미가 있어서 공간만 있으면 다 그림을 그렸어요. 그래서 그림 그리려고 하면 여기는 석고 재료들이 있잖아요. 석고상, 베토벤 상이라든가 이런 조각상들이 있는데 속사 소묘 여기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 같던데요. 속사 소묘, 그런 걸 공부하려면 그런 조각상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야 그걸로 그림 공부하는데 그런 재료들이 없어서 빌려 가고 혼자서 만들기도 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까지, 경성에 있는 도자기 단과대학으로 말하면 동양에서 도자기 대학으로서는 최초의 하나밖에 없는 거죠. 이거는 아예 도자기로 만든 4년제 대학이거든요. 거기서 공예과를 졸업했고 자격증을 따고 회령 도자기 공장에 취직하는 거죠.”

1993년 '경성도자기단과대학'을 졸업하고 회령 도자기 공장에 취직한 이상철 씨. 넉넉한 경제 활동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일을 하던 도중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졌고요.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한 일로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녹취: 이상철 도예가] "어머니 병을 치료하려고 명의사가 있다는 분들을 찾아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어떤 한의사를 만났는데 제가 말씀드린 제안이 이거였죠. 우리 엄마 병을 좀 고쳐달라, 저한테 갖고 있는 거는 그냥 두 손, 재간, 미술, 그림, 조각 이 기술밖에 없다. 이거 필요하다 하면 내가 선생님께 모든 걸 다 해드리겠다, 이렇게 했더니 선생이 무릎을 '탁' 치며 하는 말이 아, 그럼 그거면 된다는 거예요. 내가 자네 엄마를 치료해 주는 대신 자네는 반신상을 하나 해달라. 그 반신상이라는 게 여기로 말하면 흉상, 흉상을 하나 해달라 해서...”

그런데 그 흉상의 주인공이 의사의 아들이었던 게 화근이 됐습니다.

[녹취: 이상철 도예가] "자식이 둘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제일 똑똑하대요. 그래 둘째 아들한테 자기 한의학 기술을 넘겨주려고 했는데 어떻게 병 만나 죽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 아들이 너무 그립고 안타까워서 맨날 사진만 봐온 거예요. 근데 사진 보는 것보다도 조각이 낫지 않겠나, 그래서 저한테 조각을 주문했어요. 했는데 조각을 굽기 전에 아들하고 비슷하게 생겼는지 말씀해 달라. 이렇게 했더니 그것을 본 게 당의 간첩들이죠. 현장을 본 사람 중에 당에서 파견한 간첩이 있은 거예요. 걔가 당 비서한테 바로 고자질 한 거죠. 그래서 1년 12달, 비판 무대(생활 총화)에 올라서고 넌 유일사상 체계에 걸리는 짓을 했다... 개인 흉상을 만들었다는 게 죄죠. 왜 개인을 숭배할 수 있게끔 조각상을 만들었냐, 그것이 재앙인 거죠. ”

하지만 그동안 김 부자에게 도자기와 조각품을 선물한 이력이 있어 큰 화는 면했다고 하는데요.

[녹취: 이상철 도예가] "그때 제가 살아날 수 있은 것은 김일성한테도 선물했고 도자기로 또 나무 조각을 김정일한테도 올렸고 그런 이력이 있으니까 일단 선물한 사람들을 북한에서 함부로 죽이지 못해요. 왜냐하면 '이거 작품 한 사람 누구야? 데려와.' 그럴 때 이 사람 죽여서 없습니다. 그러면 큰일 나요. 그러니까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고 그냥 이 상태에서 가만히 내버려두고 1년 동안 죽도록 욕만 먹은 거지...”

북한에서의 비판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감시로 결국 이 작가는 탈북을 결심합니다.

[녹취: 이상철 도예가] "그때 당시 3월이니까 추웠어요. 얼었어요. 얼음이, 북한은 추워서 얼음이 얼었는데 두만강을 뛰어서 건너온 거죠. 2004년도에 제가 입국했거든요. 중국 대련에서부터 비행기 타고 인천공항까지 40분이면 다 오더만요. 그렇게 가까운 거리를 죽도록 고생하며 살아온 거죠. 제가 도자기 하려고 올 때부터 조각칼도 가져오고 도자기 자료집 책도 가져오고 도자기 단과대학 졸업증도 가져오고 여러 가지 도자기를 할 수 있는 가능한 최대한을 갖고 떠났죠. ”

도예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떠나온 한국행이었지만, 한국에서의 초기 정착 생활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녹취: 이상철 도예가] "이렇게 와서 도자기를 하려고 보니까 그때 당시에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도자기 회사를 찾았어요. 찾았는데 어느 회사가 직원을 모집한다, 이렇게 해서 그때 갔어요. 그런데 가기 전에 포트폴리오를 보내달라고 해서 제가 집에서 그림도 그리고 한 거 싹 다 포트폴리오를 올려서 보내줬더니 사장이 하는 말이 저희는 이렇게 기능이 높은 분은 필요 없고 심부름이나 할 사람 찾는 데 와보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한번 우리 회사에 오셔서 보시고 그래서 갔는데 거기서 얘기 나누다가 일단은 월급을 한 150만 원이면 어떻겠나? 잘라버리더라고요. 한국에서는 도자기가 도저히 안 되겠구나...”

그 당시 이 작가에게는 도예 일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북한에 남겨진 자식들을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와야 하는 일이었는데요.

[녹취: 이상철 도예가] "내가 그때 당시에 혼자 왔거든요. 가족이 오다가 다 잡혀서 북송되는 상황이고 그때 당시 큰애는 7살이고 막내는 1살짜리인 게 감옥에 들어갔거든요. 애들이 걸을 수 있는 상황이 돼야 제가 데려오겠는데 그동안 돈을 벌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열심히 벌어야 하는 거, 그다음에 그걸 벌기 위해서 생활고에 정신없이 시달리고 고생 끝에 돈을 벌어서 큰아들 데려오고 또 천신만고 고생해서 두 번째 아들 데려오고 그 애들 데려오려고 보니까 도자기는 못하고 노가다도 가고 버스도 운전해 봤다, 중장비 하거나 굴삭기 지게차도 해봤다. 뭐 식당도 해봤다. 아무튼 각종 별걸 다 해봤어요.”

그러다 작년 3월, 양구백자박물관과의 '통일 백자' 사업이 이뤄졌는데요. 덕분에 이 작가는 도예 작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녹취: 이상철 도예가] "작년에 양구군에서 '통일 백자'라는 거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인터넷에 올린 걸 찾아서 저한테 연결해 줘서 그때부터 도자기 인생이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어요. 작년 3월부터 시작해서 10월에 전시한 거죠. 양구에서 10월에 전시하고 1월에는 교회에서 전시하고 그다음 인천 교동도에서 또 전시하고 그래서 1년 새에 세 번 전시회를 열어봤어요.”

더불어 올해에는 경기도 이천에 있는 한 도자기 회사에서 일할 기회도 찾아왔다고 하는데요.

[녹취: 이상철 도예가] "도자기라는 거 하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하거든요. 도자기 가마도 필요하고 도자기 흙도 필요하고 도자기 기계도 필요해요. 물레 같은 거 이런 거 다 필요한데 작업장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작업장이 있어야 하려면 조건이 여러 가지가 많은데 그것이 안 되는 거죠. 이렇게 되니까 전시를 끝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전전긍긍한 거죠. 여주도 갔다, 이천도 갔다, 어떻게 도자기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는 수가 없겠나? 노력하던 끝에 어느 한 도자기 회사 사장을 만났어요. 도자기 타일 같은 걸 만드는 회사예요. 그분을 어떻게 용케 만나서 저하고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도자기를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나? 서로 토의하고 도자기를 하기로 하고 일단 도자기 기능이 상당히 높은 것 같은데 앞으로 도자기 창작에 관한 거는 이제부터 실장으로 임명하겠으니까 잘 해보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공장을 기초로 해서 앞으로 잘해 나갈 결심이에요.”

그러면서 북한에서부터 쌓아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도자기 타일의 도안과 제작 작업에 모두 힘을 쏟겠다고 말합니다.

[녹취: 이상철 도예가] "타일 공장이니까 타일에 아트타일이라 해서 그림도 그려놓고 조각하는 그런 것도 있어요. 제가 전공한 게 도자기 그림도 전공했고 조각도 전공했으니까, 모든 것이 다 부합되는 거죠. 작품성에 있어서는 제가 도맡아서 도안도 하고 만들기도 하고 형태도 뜨고 이렇게 해서 개선해 나갈 생각입니다.”

끝으로 이 작가는 탈북민 도예가로서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통일 도자기를 만들어 가고 싶다고 전했고요. 또 하나 자신의 공방을 차려 더 많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길 바랐습니다.

[녹취: 이상철 도예가] "자기만의 도예 공방을 차려놓고 자기 도자기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작품실도 마련해 놓고 이제 제가 일하고자 하는 공장도 열악한 상태예요. 지원이 안 되고 싼 도자기가 막 흘러들어오다 보니까 도예 작가들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두는 그런 일도 많더라고, 그러니까 이걸 되살리려면 힘 있는 국가단체들이 선두에 서서 작은 공장 같은 데 도움 주고 저 같은 경우에는 작품 생활, 작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좀 열어주셨으면 하는 그게 바람입니다.”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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