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오랜 시간 군인 생활을 하다 3번의 탈북 끝에 한국에 정착한 한 탈북민이 있습니다. 북한의 한 부대에서 대위로 근무한 탈북민 정문화 씨인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북한 (전) 대위 출신 정문화 씨’의 얘기 전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녹취: 정문화 씨] “첫 탈북에 중국으로 팔려 가는 줄 몰랐어요.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따라가는 거로 생각했지. 이 사람들한테 ‘나를 인신매매로 팔아주세요.’ 하고 가는 줄도 몰랐어요. 인권이라는 말을 몰랐기 때문에요.”
탈북민 정문화 씨가 첫 탈북에 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최근 정문화 씨는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열린 ‘남북더보기’ 행사에 참여했는데요. 북한에서 근무했던 군 생활과 한국에서의 정착 생활을 남북한 출신 주민들에게 전했습니다. 먼저 행사에 관한 소개부터 들어보죠. 경희대학교 행정학과 김태영 교수입니다.
[녹취: 김태영 교수] “올해에도 몇 개 프로그램을 진행할 텐데 그 첫 주제가 여군 편입니다. 그래서 북한군 여군 대위, 남한 여군 대위 두 분을 모시고 군 생활에 관한 거 특별히 여군 생활에 관한 공통점, 차이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받는 프로그램입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군인 하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북한군과 남한군은 생활도 다르고 사고하는 방식도 다르고 처우도 많이 다르고 특히 여군의 경우에는 그 차이가 좀 더 심한 것 같아요.”
그래서 ‘남북더보기’ 행사를 통해 직업군별 서로 비슷한 점과 문화 차이를 알아갈 수 있었는데요. 북한 출신 여군으로 참여한 정문화 씨가 함께한 계기부터 들어봤습니다.
[녹취: 정문화 씨] “북에서 살 때는 인권에 관해서 잘 몰랐고 내가 받는 수모랑 이게 인권 침해라는 걸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는데 대한민국에 와서 10년 차로 살면서 보니까 우리에게도 고귀한 인권이 다 있고 지켜야 할 권리도 있고 그런데 그거를 나처럼 모르고 지낸 사람들이 아직도 있을 거잖아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나도 더 배울 겸, 또 인권 침해가 더 이상 없길 바라면서 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북한에 대해서 연구하시는 분들이나 통일 쪽으로 지향하시는 분들이 연구해서 나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빨리 통일의 길을 열어주길 바라는 의미에서 나오게 됐습니다.”
북한에서는 8년 정도 군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입대했을까요?
[녹취: 정문화 씨] “90년대에는 무조건 조국을 통일하겠다는 구호가 의무적으로 도시 곳곳에 붙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 어릴 때 교육받기는 무조건 조국을 통일하자, 이런 구호를 많이 들었고 그때 당시는 혈기 넘치는 젊은 나이 때니까, 들뜬 김에 군대에 나갔던 것 같고 정작 군대에 가서 무조건 군 복무에 충실해야 하는 것만큼 군부대 탈영이라든가 이런 거 하는 경우에는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한테까지 영향이 미치니까 군 복무 기간에는 충실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전역할 때까지도 외부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녹취: 정문화 씨] “군 복무하면서 정해진 지역을 우리가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됐어요. 일체 사회생활을 알 수 없어요. 모든 통신이 차단돼 있고 신문도 군인 신문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 전투력을, 군인들 사기랑 떨어질까 봐 그런 모든 불필요한 소리가 없어요. 무조건 우리가 강하다. 무조건 우리가 물리쳐야 조국이 통일된다. 이런 생각만으로 그런 교육만 받고 군 복무했었고 전역 되어서 보니까 너무 현실과 달랐어요.”
1990년대 말, 전역하고 북한 사회에 나와보니 북한의 배급제는 붕괴했고요. 고난의 행군으로 정문화 씨의 가족 또한 어려움을 겪게 됐습니다.
[녹취: 정문화 씨] “96년도 그때부터인가, 전역할 당시는 잔돈 1전도 없을 정도로 그랬었고 저는 군 복무 기간에 조선노동당에 입당했으니까 입당한 사람은 무조건 당 생활을 해야 하므로 회사에 무조건 들어가야 해요. 그러니까 먹을 것도 없으면서 출근하는 게 너무 버거웠고, 전역할 당시에 동창들은 이미 탈북하고 추억이 깃든 동네가 고난의 행군이 겹치면서 싹 다 바뀐 거예요. 1년 지나서 너무 살기 힘들고 엄마가 치료비가 없어서 돌아가시고 그때 당시에 친구들이 자기 오늘 중국으로 도망친다고, 너도 가자고 해서 그때 24시간 동안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3년만 돈 벌고 오자고 해서 떠난 게 첫 탈북이었고…”
하지만 정문화 씨는 몇 개월 뒤 다시 북송됐습니다. 1년 동안 노동 단련대에서 처벌받았고요. 북한 사회에 나온 그녀는 친구들과 장사 일을 하게 됐죠.
[녹취: 정문화 씨]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 도저히 회사 다녀도 안 되고 해서 그때 당시에 한국 드라마인가? CD-R를 파는 거였어요. 중국에서 받아다가 중부 지역에다가 팔면 엄청 돈이 떨어진다고 하니까 친구들하고 그런 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물건을 받아주고 나르는 운반 역할하고 이렇게 겨우 살아가는 도중에 어디 앞 선에서 위험에 처했는데 그거를 들키게 되면 엄청난 처벌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그녀는 할 수 없이 두 번째 탈북하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어르신 집에서 가사 일을 도왔는데요.
[녹취: 정문화 씨] “단둥 쪽에 갔어요. 집 청소해 주고 반찬 같은 거 해주고 살면서 또 그 집 어르신은 북에서 왔다고 불쌍하다고 며칠에 한 번씩 돈을 쥐여주고 하니까 그거를 모으고 도망칠 기회만 보다가 한 7~8개월 되니까 한국 돈 계산하면 한 100(만원) 얼마밖에 안 돼요. 북한에 보내달라고 한 달 졸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나를 넘겨줘서 국경선까지 다시 나갔죠. 이틀 걸쳐서…”
중국에서 번 돈으로 다시 북한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녀는 또 다른 시련에 부딪혔습니다.
[녹취: 정문화 씨] “북한에 다 도착해서 잠복해 있던 수사대한테 잡혔어요. 봄에 갔던사람이 가을에 다시 이만한 물건 들고 갔어요. 내가 이제, 옷가지 몇 개 연 게… 그걸로 건너서 서니까 그때 당시 경찰들이 군 복무 경력 때문에 나쁜 물을 먹었구나, 경찰서로 끌고 들어간 거죠. 그래서 교도소에서 내가 군복무 기간에 받았던 훈장, 메달, 당증 이걸 다 박탈당해요. 교도소 기간에 난 무조건 살아서 나가야 한다. 탈북해야 하겠구나. 이 사회에서 살아있을 이유가 없어서 진짜 2년 끝내고 바로 탈북했어요.”
그녀의 3번째 탈북. 중국에서 2년을 지냈지만, 신분 없이 살아야 하는 두려움에 결국 2015년 한국에 정착했습니다. 현재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녹취: 정문화 씨] “원래는 회사 생활도 해보고 식당 일도 해봤는데,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북한에서 우리가 마음대로 만지지 못했던 식자재, 식재료들 사람들은 왜 식당을 하느냐? 힘들다고 하는데 저는 의외로 재밌어요. 그래서 늘 식당에서 음식 해서 손님상에 나갈 때마다 기분도 좋고 우리 아버지가 좋아했던 음식도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주면, 의외로 손맛이 좋다고 그러니까 더 기분 좋아서 하고 가장 큰 거는 돈 잘 벌잖아요. 여기는 일하는 것만큼 보수가 있고, 이제는 즐길 날만 생각하고 뭘 하면서 놀까? 생각뿐이에요.”
또한 누구보다 어렵게 자유를 찾은 만큼, 탈북민을 위한 봉사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녹취: 정문화 씨] “여기 와서는 마음껏 누리고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근데 사람들이 그런 걸 못 할 때 내가 해줄 수 있겠구나, 아플 때 어디를 연결해 줄 수 있고, 중국에서 살다 보니까 중국 애들이잖아요. 그러면 한국말을 못 해서 그 학교에 적응이 안 되고 엄마가 애를 붙잡고 같이 울고불고하는 거를 수없이 봐서 이런 거를 다문화하고 연결해 주고 한두 번 해주니까 성취감을 느꼈어요. 내가 발바닥 아프게 조금 뛰어다녔더니 이 사람한테 도움 됐구나! 하는 걸 느끼다 보니까 그게 커져서 지금은 100명 넘어요.”
현장의 관람객들은 북한 출신 여군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요. 북한의 군 문화를
알아간 뜻깊은 기회가 됐다며 정문화 씨가 이제는 한국에서 더 행복한 삶을 누리길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도 전했습니다.
[녹취: 탈북 여성] “저도 고향이 북한이긴 한데, 군인 생활을 못 해봐서 몰랐는데 북한 군인 생활에 대해서 들었을 때는 군인들이 생리대를 네 것, 내 것 없이 그것도 위생 건강과 관련한 거잖아요. 그렇게 돌려가면서 쓴다는 데 대해서 가슴이 아팠고 저희는 여기서 풍족해서 얼마나 남는 게 많고 버리는 게 많아요. 주고 싶고 그런데 줄 수도 없고 그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서 느꼈어요.”
[녹취: 한국 시민] “안타까운 생각, 공감이 가고 김치를 훔친 거 그것도 이해되는 게 제가 1985년도에 입대했어요. 우리도 김치를 얻으러 간 적이 있어요. 마을로, 비참한 거 아니에요. 상황이 열악하면 그렇게 하는 거지, 충분히 이해되고 잘 됐으면 좋겠어요.”
[녹취: 오정석 씨] “예전에 군대 생활했을 때 하고 비교할 수밖에 없었고요. 실제 근무하셨던 (북한 출신) 여성 장교의 얘기를 들으니까요. 한국하고 북한하고의 상황 같은 거를 잘 알 수 있었다, 그 문화 대위분께서 말씀하셨을 때 본인이 그때 당시에는 거기가 최고였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까 다른 것처럼,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이런 프로그램이 활성화돼서 저같이 잘 몰랐던 사람들도 많이 알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