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장길수 가족의 탈출을 도운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의 소식을 전해드렸는데요. 중국에서 장길수 소년을 처음 만난 뒤, 문국한 대표에게 소개해 함께 도운 한 조선족 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서영숙 씨인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한국으로 귀화해 현재 북한인권 개선 활동을 하고 있는 ‘북한인권국제연대 서영숙 씨’의 얘기 전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녹취: 서영숙 씨] “여기 지금 3만 5천 명 탈북자가 왔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 제가 3자에서 볼 때 한국분들이 없으면 절대로 탈북자들이 여기로 올 수가 없어요. 중국에 와서도 한국분들이 와서 조선족을 교육해서 가게 만들고, 보호하게 만들고, 그 모든 노력이 한국분들이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대단한지 그걸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데..., 생명을 구해줬잖아요. 그래서 저는 어디 가나 한국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탈북자들이 여기로 올 수 있었다. 그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중국에서 13년 동안 장사 일을 해온 조선족 서영숙 씨. 문구 사업을 하기 위해 중국에 온 문국한 대표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요.
[녹취: 서영숙 씨] “전 사실 시장에서 장사했습니다. 자유 시장에서, 그러다가 우연히 대표님이 중국에 오셔서 처음 만났는데 노트하고 펜을 갖고 왔더라고…, 하얀 펜 있잖아요. 그게 중국에 없었어요. 그런 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거 팔아줄게요. 그랬어요. 그래서 제 가게에다 그걸 놨는데 삽시간에 이게 다 팔린 거야, 그래서 내 같이 장사합시다. 계속 비행기 타고 가서 그거 가져오라고 그랬지.”
그렇게 서영숙 씨는 문국한 대표와의 인연을 이어가게 됩니다. 문국한 대표는 장길수 가족을 돕기 전, 1996년 중국 옌지에서 만난 한 탈북 청년을 도와 한국으로 데려오기도 했는데요. 1999년 서영숙 씨를 통해 장길수 가족을 알게 되며 이것은 운명이라고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서영숙 씨는 장길수 소년을 어떻게 만나게 된 걸까요?
[녹취: 서영숙 씨] “장길수 가족은 99년 8월 21일에 꿈속에서 만났어요. 이렇게 꽉 쥐고 놓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놔라, 날 살려주겠다고 말하면 놓겠대. 그리고 이렇게 올려다봤는데 한 15살 되는 남자아이 같아요. '그래 살려주마.' 하고 놓으니까 그게 꿈이었어요. 이상하다. 무슨 애가 이렇게 나보고 살려달라 할까? 그래서 부랴부랴 밥을 해놓고 남편한테 말하고, 택시 타고 어디로 먼저 가는가 하면 공항으로 갔어요. 찾아다녔어요.거기 동서남북으로 해서 남쪽에 또 한 개 도시가 있어요. 그쪽으로 갔는데 전화를 조그맣게 해놓고 전화를 걸게 하고 돈을 받는 할머니가 있어요. 그 할머니가 저하고 같이 장사했거든요. 그 할머니한테 가서 꿈 얘기를 했어요. 내가 이래서 지금 찾아다니는데 못 찾았다고 그러니까, '야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 기다려 봐라. 네 꿈속의 아이가 올 거라고….' 근데 먼 데서 어떤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이렇게 오는 거야...."
그 당시 장길수 소년은 외할아버지와 함께 도매시장에 다녔는데요. 자전거에 채소를 가득 싣고 골목을 다니며 파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서영숙 씨를 만나게 된 거죠.
[녹취: 서영숙 씨] “그때 우리가 두만강을 건너는 아이들을 강탁이라고 하거든요. '아, 네가 강탁이구나. 네 강탁이 맞지?' 막 이러면서 놀라는 거야. 낯선 사람이니까, ‘강을 타고 강을 건너왔다.’ 그걸 강탁이라고 해요. 중국에서 거기 사람들은 강탁이 하면 탈북자들인 거 알아요. 그러니까 얘가 놀라는 거야. 난 그때 생각에는 ‘옳지, 이 아이가 하나니까 내가 대표님한테 소개해 주면 이 아이는 (한국으로) 데리고 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하지만 장길수 가족은 모두 15명이었습니다. 서영숙 씨는 당황했지만, 그 사실을 한국에 있는 문국한 대표에게 알렸고요. 그들의 은신처를 어서 마련하라는 얘기를 듣고 서영숙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그들의 은신처를 마련해줬죠. 그러면서 한국으로 갈 방법을 함께 알아봤습니다.
[녹취: 서영숙 씨] “무지하게 알아봤는데 찾아가니까 1인당 400만 원 내면 데려간대요. 근데 아기가 임신 5개월 만에 탈출해서 중국에 왔는데 태어났잖아요. 그러니까 16명이 됐단 말이에요. 근데 이 가족이 1살부터, 영아부터 70살까지 있어요. 이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탈출해요. 그래서 계획한 게 유엔 사무소가 북경에 있었어요. 저길 들어가자. 근데 그때 길수 엄마가 잡혀갔어. 그때 길수 엄마 붙잡히면서 저 애기네 가족이 다 북송됐어요. 그러니까 은신처가 발각되게 됐잖아요. 그래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보내야 되겠다고 해서 은신처에 있는 일곱 사람을 유엔 사무소로 들여보냈지. 그게 2001년 6월 26일이었어요."
2001년 8월, 몇 달 전 북송됐던 장길수 가족의 친척, 한미네 가족이 재탈북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2002년 5월 선양 일본 총영사관에 진입을 시도하다 중국 공안에 끌려 나오게 되는데요. 당시 두 살 한미 양의 사진이 국제 사회에 알려지면서 탈북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고요. 한미네 가족은 같은 해 5월 23일 한국에 무사히 입국합니다. 그리고 신변이 위험해진 서영숙 씨도 한국에 왔죠.
[녹취: 서영숙 씨] “제가 2002년 9월에 와서 난민 신청을 했어요. 난민 신청을 했는데 7년 동안 호적 없이 살았잖아요. 여기서 의료 보험도 안 되고 취직도 안 되고 정말 죽을 고생 했어요. 만 7년 만에 한 번도 해외를 안 나가고 범죄를 안 저지르고 그런 사람들에게 귀화 자격증을 줬어요. 그래서 보름 동안 공부해서 시험을 봤어. 그때 사람들이 놀란 게, 너는 60이 넘었는데 왜 시험 보느냐? 65세 되면 그저 할 수 있는데..., 근데 난 한시 급하잖아요. 그래서 시험을 봤는데 다음 주에 면접 보고 바로 신분증이 나왔어요. 제 신분증이 나오는 날에 너무 울어서 그 동사무소 책임자가 우리가 무슨 잘못 했습니까? 말해달라고, 아닙니다. 나도 이제는 당당한 대한민국 사람이 돼서 기뻐서 운다고, 탈북자는 여기 와서 6개월이면 조사 다 받고 나오면서 신분증이 나와요. 근데 나는 그걸 구출한 사람인데 7년 동안 대우를 못 받고 정말 그때는 인생의 허무함 같은 느낌이 들었어. 근데 나는 얘네를 보내고 일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근데 와보니까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렇게 서영숙 씨와 문국한 대표는 '북한인권국제연대'라는 단체를 만들어 지금도 중국에 있는 탈북민을 구출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녹취: 서영숙 씨] “탈북자들의 세계가 좁아요. 너는 돈을 얼마를 내기로 하고 왔느냐? 그럴 거 아니에요. 근데 우리는 돈 받은 게 하나도 없거든요. 오히려 대표님이 빚을 져서 구출했거든요. 너는 왜 돈 안 내고 왔느냐고 서로 쟁론이 나고 그러다 보니까 이 ‘북한인권국제연대’라는 단체는 돈을 안 받고 탈북자를 구출하는 게 알려져서 계속 중국에서 연락이 와요. 컴퓨터로, 그것도 우리한테 직접 하는 게 아니고 미국으로 해서 와요. 미국에 우리 단체 책임자가 있어요. 전화가 와요. 이런 사람이 있는데 구출해 봐라. 근데 우리는 못 들어가잖아요. 둘 다, 그래서 자원봉사단체 사람들을 통해서 직접 가서 구출해 오고 지금도 해요."
더불어 서영숙 씨는 탈북민의 상담도 돕고 있는데요.
[녹취: 서영숙 씨] “저는 상담을 많이 해요. 코로나에는 집을 찾아갔고 지금은 밖에서 만나 커피숍에서 만나거나 공원에서 만나거나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하고 거기에서 무슨 어려운 점이 있으면 바로 대표님한테 말해요. 이 사람은 예를 들어 치과에 가야 하는데 지금 어떤 상태라고 하면 대표님이 알아서 다 컴퓨터로 연락해서 치료받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실비보험에 가입하라면 내가 병도 안 나는데, 왜 거기다 돈 바치냐고 안 하잖아요. 근데 병이 나서 도움을 못 받잖아요. 그런 거는 또 남북하나재단이라고 있어요. 거기에서 얼마간 보조를 주는 게 있어요. 그런 것도 모르잖아요. 그게 저는 탈북자들하고 상담하고 대표님은 한국 사람이잖아요. 그 루트를 다 알잖아요. 그런 활동을 많이 하고...."
그리고 탈북민이 가장 외로워하는 명절이 될 때면 홀로 사는 독거노인을 위한 선물을 보낸다고 하는데요.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은 서영숙 씨의 생활을 아는 탈북민들은 서로를 돕고 있었습니다.
[녹취: 서영숙 씨] “혼자 사는 독거노인들이 좀 있어요. 탈북자들 가운데, 그래서 명절이 되면 고독하잖아요. 조금이라도 도움 주고 싶다는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모금해서 택배로 물건을 보내요. 몇 년째 했는데, 해마다 구정에는 꼭 기다린대요. 전화가 와, '야 내 기다리는데 물건 받았다.' 별거 아닌데도 그런 활동을 점차 하면서 아직도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구나 그런 생각이… 그래서 지금은 탈북자들이 내가 가면 자기네 입던 옷을 다 줘요. 내가 어렵게 산다는 거 아니까 그럼 저는 내가 입든지 못 입든지 다 가져다가 경로당에 갖다줘요. 못사는 할머니도 있잖아요. 이거 입을 만하면 입고 못 입으면 팔아보세요. 여러 가지 이렇게 결합하면서 활동하고 또 전시, 북한 인권을 알리는 그런 거 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