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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의 세상보기] '탈북민 1호' 이영현 변호사


[탈북민의 세상보기] '탈북민 1호' 이영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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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탈북민이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는 만큼 한국에 정착한 뒤에는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제2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1997년 고난의 행군 시기 탈출한 이영현 씨도 2002년 한국에 정착해 오로지 꿈 하나만을 바라보고 노력해 탈북민 1호 변호사가 됐는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탈북민 이영현 변호사'의 강의 현장으로 안내해 드립니다.

많은 탈북민이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는 만큼 한국에 정착한 뒤에는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제2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1997년 고난의 행군 시기 탈출한 이영현 씨도 2002년 한국에 정착해 오로지 꿈 하나만을 바라보고 노력해 탈북민 1호 변호사가 됐는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탈북민 이영현 변호사’의 강의 현장으로 안내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녹취: 질의응답 현장음] “다른 직업들도 많잖아요. 판사라든지 검사라든지 왜 변호사가 되고 싶었는지 궁금합니다.”

[녹취: 이영현 변호사] “일단 검사는 국가의 권력을 행사하는 직업이고 판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직업이고 그런데 저는 탈북민을 돕는 사람, 누구의 권익을 옹호하고 개선하고 돕는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변호사가 돼야 그런 도움 주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변호사가 되겠다는 생각만 했고....”

최근 열린 ‘사단법인 우리온’의 DnL 스쿨 특강에서 남북한 출신 수강생과 이영현 변호사가 특강 후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영현 변호사는 ‘꿈은 꼭 이루어진다’는 제목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는데요.

[녹취: 이영현 변호사] “20살에 한국에 왔어요.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다 대학생이시고 여러분들 비슷할 때 아마 제가 왔을 거예요. 한국에 와서 저는 뭘 할까? 처음에 고민을 좀 했습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나이 20살에 고등학교 입학했고요.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 탈북민이 학교를 늦게 가죠. 북한에서 공부를 많이 못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에 입학했고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부산에 있습니다. 지금은 학교가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서 폐교했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구촌 고등학교’라고 저보다 3살 어린 친구들하고 같이 공부를 시작했어요.”

배우겠다는 열의는 가득했지만, 늦깎이 공부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녹취: 이영현 변호사] “스무 살에 교복 입고 교실 들어가고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고 이런 것들이 참 좋았어요. 근데 그게 오래 가지는 않더라고요. 학업을 따라가야 하는 데 따라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제가 북한에서 사는 동안 학교를 잘 다니지도 못했고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부터는 학교를 거의 가지 못했어요. 늘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산에 가서 풀도 뜯고 나무껍질도 벗겨 오고 들에 가서 돼지감자나 먹을거리들을 가져오느라 학교 갈 시간도 없었죠.”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이영현 씨는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합니다. 탈북민 더 나아가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해서인데요.

[녹취: 이영현 변호사] “저는 북한 인권 변호사의 꿈을 꾸고 법대에 들어갔습니다. 연세대학교 하면 나름대로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이 많이 가죠. 사실 그 안에서 쟁쟁한 친구들 안에서 학업을 이어 나가야 하는데 참 쉽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때도 제대로 학교생활을 잘 따라가기 어려웠는데 늘 시험을 보면 진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책을 봐도 이해되지 않고 뭘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좌절도 많이 했습니다.”

학업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영현 씨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 하나로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는 말을 늘 되새겼습니다.

[녹취: 이영현 변호사] “기초 학습 능력이라고 하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된 거예요. 혼자 법서를 보는데 한 페이지를 보는 데 한 시간이 걸려요. 그러니까 10 페이지 보는 데 하루 종일 걸리는 거예요. 10 페이지 딱 봤으면 기억에 남아야 하는데 기억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몇 달 혼자 사법고시 공부하다가 포기하고 로스쿨에 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로스쿨을 진학했습니다.”

로스쿨(law school)이란 법률가를 양성하기 위한 법학 전문 대학원인데요.

[녹취: 이영현 변호사] “로스쿨은 지원자가 요새도 한 1만 명 되나요? 2천 명을 뽑는데 한 1만 명 정도 지원할 거예요. 하여튼 그렇게 경쟁을 치르고 로스쿨에 들어갔죠. 들어갔는데 로스쿨이라는 과정도 굉장히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대부분 학부 과정을 마치고 로스쿨에 가거든요. 법조인이 되겠다고. 근데 공부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친구들이 보통 대학교 졸업하고 공부에 대한 자신이 있으니까 로스쿨 많이 오거든요. 그런 친구들하고 매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공부하고 시험 보고 참 쉬운 과정이 아니었는데요. 하여튼 힘들게 로스쿨 과정을 3년 과정을 마쳤어요.”

그리고 로스쿨 3년 과정을 마친 뒤 졸업 시험을 봐야 하는데요. 졸업하는 첫 해, 이영현 씨는 동기들과 졸업하지 못했고요. 그다음 해 다시 도전해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변호사 시험에 도전하게 되죠.

[녹취: 이영현 변호사] “2015년도 변호사 시험에 처음 응시해 봤는데 변호사 시험의 벽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높은 거예요. 일단 시험 보러 들어가서 보고 나왔는데 내가 들어가서 뭘 했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런 시험을 처음 경험하면서 이게 참 어렵구나, 변호사 된다는 게 너무 어렵겠구나. 성적을 딱 확인해 봤는데 커트라인이 그때 당시에는 750점인가 아마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저는 500점 대인 거예요. 이게 1점, 2점 차이로 떨어지잖아요. 근데 저는 250점, 300점 정도 거의 차이가 나는데 저랑 비슷한 성적을 받았던 친구들은 포기해요. 저는 그런데 한번 해보자, 지금 밑바닥이기 때문에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도전했죠.”

하지만 그 이후 4번의 시험 모두 불합격됐는데요.

[녹취: 이영현 변호사] “시험이 1년에 한 번 딱 있어요. 두 번, 세 번, 네 번 떨어진 거예요. 해마다 시험 떨어지면 제 주변의 친구들이 저를 걱정해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를 알기 때문에 시험 딱 발표 당일이 되면 전화하고 제 주변에 찾아와요. 그렇게 4년 공부했는데 계속 시험이 안 된 거죠. 안 됐고 근데 제가 계속 시험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희망을 봤던 건 어쨌든 제 마음 가운데 나는 포기 안 한다. 법조인이 되겠다는 사명이 내 마음 가운데 있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 안 하고 가는데 어느 순간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붙고 공부하는 방법을 알겠더라고요.”

그는 노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3번째 시험부터는 성적이 급속도로 오르기 시작했고요. 합격의 가능성을 보게 됐죠.

[녹취: 이영현 변호사] “정말 마지막 시험 때는 오로지 합격해야 한다는 그 생각만 제 머릿속에 늘 있었어요. 제 눈이 닿는 곳에 저는 다 합격이라는 문구를 써 붙였거든요. 베개, 독서실, 책 커버 그냥 모든 곳에 합격이라는 키워드를 입력시켜 놓은 거예요. 늘 합격, 꼭 합격할 거야. 스스로 격려하고 그렇게 공부했어요. 열심히 하면 반드시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계속 갖고 있었고....”

합격에 대한 믿음과 함께 그는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도 단축해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녹취: 이영현 변호사] “사실 그때는 하루에 한 20시간 정도 공부했고 잠자는 시간이 한 3~4시간 정도였어요. 다섯 번 시험을 볼 수 있는데 마지막 기회였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만일 시험이 안 된다 그러면 '괜찮아. 나는 다 받아들일 수 있어.' 라는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고 밥 먹을 때도 한 5분 내로 빨리 먹을 수 있는 면 같은 걸, 그래서 짜장면을 엄청 많이 먹었거든요. 후루룩 먹으면 되니까 먹고 또 갈 때는 걸어가지 않았어요. 그냥 늘 뛰어다녔어요. 짧은 거리인데도 늘 뛰어다니고 사람들이 ‘쟤는 뭐야?” 맨날 뛰어다니니까....”

결국 이영현 변호사는 2019년, 5번의 도전 끝에 합격이라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녹취: 이영현 변호사] “저는 시험 합격했을 때, 그 모니터 컴퓨터 화면에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딱 뜨는 그걸 보는 순간 일단 온몸에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일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순간 벌떡 일어나서 그때는 정말 그 해방을 맞은 우리 선조들이 어떤 느낌이었을까? 어떤 감격이었을까? 그걸 제가 느낀 거예요. 늘 제가 시험 결과 확인할 때 옆에 있었던 친구인데 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막 미친 사람처럼 방방 뛰니까 만세를 부르고 하니까 괜찮냐고 공부하다가 이상해진 거 아니야 놀렸는데 이렇게 기쁜 순간을 맞았죠. 정말 참 그 순간에 생각나는 분들이 참 많았어요.”

그렇게 탈북민 1호 변호사가 된 이영현 씨. 북한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던 이영현 씨는 탈북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발 벗고 나섭니다.

[녹취: 이영현 변호사] “무료로 변론도 하고 무료 상담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탈북민 출신 변호사로서 같은 경험을 과거에 했고 힘든 시간을 거쳐서 한국에 왔기 때문에 서로 공감대가 있는 거죠. 그래서 어떤 법률적인 문제를 얘기했을 때 공감하고 잘 이해하고 하므로 그런 부분들은 굉장히 좋아하세요. 그런 부분들도 제가 잘 알기 때문에 니즈에 맞게 제가 조언을 해드리고 하면 그것도 감사해하시고....”

그러면서 궁극적인 자신의 목표를 전했는데요. 북한에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고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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