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정권수립 기념일을 맞아 대외 메시지는 일절 없이 정규군 조직을 배제한 민간조직 중심의 비정규군만으로의 열병식을 거행했습니다. 경제난 타개와 체제이완 차단이 당면한 우선 과제가 된 처지가 반영된 이례적인 현상이라는 분석입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 대외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정권수립 기념일인 이른바 ‘9·9절’ 73주년을 맞아 9일 0시 민간과 안전무력 열병식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성대히 거행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또 환영곡이 울리는 가운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열병광장 주석단에 나왔다고 전했습니다.
열병식은 노농적위군과 사회안전군 등 비정규군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일부 재래식 무기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등 전략무기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김 위원장의 열병식 연설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노농적위군은 1959년 1월 창설된 북한 최초의 민간 군사조직으로 노동자와 농민, 사무원 등 북한 인구의 4분의 1인 570만 명이 속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하면서 민방위 업무를 하고 유사시엔 군과 함께 지역방어 임무와 같은 정규군 보충, 군수품 수송 임무를 수행합니다.
북한이 노농적위군을 중심으로 열병식을 진행한 것은 지난 2013년 정권수립일 이후 8년 만입니다.
또 사회안전성은 민생과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조직입니다.
한국 군 당국에 따르면 이번 열병식은 약 1시간 동안 비교적 짧게 진행됐습니다.
앞서 지난해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이 2시간16분, 올해 1월 8차 당 대회 계기 열병식이 1시간30분 분량으로 녹화중계됐던 것과 비교하면 약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날 행사에 앞서 전날인 8일 경축행사에 참가한 각 분야의 공로자들을 집무실인 본부청사로 불러 “공화국의 존엄은 애국 열의에 불타는 인민의 영웅적 투쟁의 고귀한 결정체”라며 이들을 치하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은 전했습니다.
한국 통일부 당국자는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이번까지 총 11차례 열병식이 개최됐다”면서 “기존엔 열병식이 주로 5년 또는 10년 단위로 꺾이는 해를 일컫는 정주년을 중심으로 개최됐지만 최근 보다 빈번하게 열리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의 비정규군에 해당하는 민간 군사조직이 중심이 된 이번 열병식이 내부 결속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국제사회 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장기화 등에 따른 복합적인 위기에 처한 북한의 처지가 반영된 현상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내부적으로 자원 투입할 곳이 많은데 대규모 열병식을 한다는 것은 부담이고 그만큼 지금 자원 여력도 없을 거에요. 따라서 노농적위군이나 비정규병 중심으로 약식으로, 준비기간도 며칠 밖에 안됐거든요. 그렇게 본다면 존재감 부각 정도, 체제 결속을 도모하는 이 정도 선의 행사성으로 볼 소지가 있고요.”
통일연구원 홍민 박사는 경제난, 신종 코로나 사태 장기화, 수해 복구 등을 위한 노력 동원에 지친 민심을 달래고 체제를 결속하는데 초점을 맞춰 기획된 행사라고 평가했습니다.
홍 박사는 특히 열악한 대내외 환경 속에서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의 첫 해인 올 한 해 결산에 곧 돌입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 정권의 관심이 내부 결속과 주민 독려에 집중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홍민 박사] “이렇게 민간인들의 열병식 참여를 통해서 사회적 군사적 규율을 부여하면서 사회적 결속력을 다지는 의미 하나와 바로 심리적인 격려, 고무를 시키는 두 가지가 상당 부분 같이 갔을 것으로 보여지고 이게 코로나 비상방역에 맞는 민간을 조직화하고 통제하는 역량 이런 것들도 관련이 있다고 봐요.”
이번 열병식을 통해 이렇다 할 대외 메시지가 없었다는 점으로 미뤄 북한이 대외관계 측면에서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민간 연구기관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신범철 외교안보센터장은 김정은 위원장으로선 연초부터 추진한 자력갱생 노선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대외관계 카드를 쉽게 버릴 수 없을 것이라며,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는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녹취: 신범철 센터장] “대외정책 변화의 시점이나 내용은 아직도 김정은 위원장이 고심 중이다, 다만 도발을 강도 높게 하지 않음으로 해서 다양한 선택지를 쥘 수 있다, 도발을 해버리면 북한이 가지고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잖아요. 그런 차원에서 고려를 한 것이고.”
한편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북한 정권수립 73주년을 맞아 김정은 위원장에게 축전을 보내 양국 간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