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러 나라가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조치 등을 즉각 수용할 수 있는 법적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는 자금세탁방지기구의 평가가 나왔습니다. 제재 대상을 식별하거나 관련 자산을 동결하기 어려워 국제적 제재 이행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입니다. 함지하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전 세계 자금세탁과 테러자금 조달을 막기 위해 설립된 자금세탁방지기구(FATF)는 각국의 제재 이행 체계에 만족스럽지 않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자금세탁방지기구는 지난달 발표한 ‘FATF 기준에 대한 준수와 효력 현황 보고서’의 ‘확산 금융 방지’ 부문에서 “대부분의 국가는 확산 금융과 관련된 정밀 금융 제재가 유엔 안보리에 의해 요청될 때 이를 지체 없이 이행할 수 있는 법적 틀을 아직 만들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확산 금융 (proliferation financing)'은 핵과 생화학 무기의 제조와 획득, 수출 등에 사용되는 자금 또는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자금세탁방지기구는 각국에 대한 평가 항목에서 이 사안을 ‘권고안 7번’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권고안 7번’은 각국이 기준과 절차에 따라 안보리 대북 결의 이행에 필요한 법적 권한을 만들었는지, 국내 기관 등을 선정해 정밀 금융제재를 시행하는지, 필요에 따라 북한이나 이란 관련 자금을 동결하는지 등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자금세탁방지기구는 이번 보고서에서 “각국은 대리인이 보유 중인 제재 대상 자산을 식별하는 것과 민간 기관을 관리하는 데 대한 명확한 정책의 전달과 시행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표본으로 선택된 59개 나라 중 단 34%만이 유엔 안보리가 지정한 제재 대상 목록을 지체 없이 자국으로 편입, 관리하고 있었다고 덧붙였습니다.
반면 이날 함께 공개된 그래프에 따르면 이들 59개국 중 27%는 제재 대상 목록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지체’가 발생했으며 24%는 이들 제재 대상자를 자국법으로 다룰 수 있는 법적 체계를 아예 구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 51%의 나라들은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정이 내려진 자산을 즉시 동결할 수 없고, 이에 따라 제재 대상 자산이 해당 국가를 빠져나갈 위험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VOA는 지난해 10월 이번 FATF 보고서가 지적한 내용이 포함된 ‘권고안 7번’ 항목에서 각국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분석한 바 있습니다.
당시를 기준으로 평가받은 나라는 모두 118개였는데 이 중 15개 나라가 결함이 없다는 의미의 ‘준수(Compliant)’ 즉, C 등급을 받았고, 44개 나라는 ‘대부분 준수(Largely Compliant)’를 뜻하는 LC 등급을 받았습니다.
반면 중간 수준의 결함이 있다는 의미의 ‘부분 준수(Partially Compliant)’ PC 등급을 받은 나라는 35개국, 24개 나라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의미의 ‘미준수(Non-Compliant)’ NC 등급이 내려졌습니다.
결과적으로 C와 LC 등 긍정 평가를 받은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가 각각 59개로 같았습니다.
당시 한반도 주변국들은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 러시아는 부분 준수인 ‘PC’ 등급, 중국은 가장 낮은 평가인 ‘NC’ 등급을 받았습니다.
한국은 자산동결과 관련한 일부 법적 근거 미비 등의 결함이 지적됐고, 일본은 제재 이행에 일부 지연이 있는 사실 등이 PC 등급을 받은 이유로 제시됐습니다.
중국의 경우 금융제재에 대한 포괄적 법적 체계를 갖추겠다는 높은 수준의 정치적 약속을 표명하고, 북한과 관련한 안보리 결의들에 조치를 취했다는 긍정적인 내용이 보고서에 담겼지만, 정작 자산동결 등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NC 등급이 내려졌습니다.
반면 미국의 경우 이들 나라들보다는 한 단계 높은 ‘대부분 준수’ 즉 LC 평가가 매겨졌습니다.
자금세탁방지기구는 지난 1989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금융기관을 이용한 자금세탁에 대처하기 위해 설립돼, 매년 10개 안팎의 나라를 대상으로 자금세탁과 테러자금 조달 방지 등에 대한 이행 상황을 평가한 뒤 보고서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VOA 뉴스 함지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