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의 남하를 막는데 큰 공을 세운 미군 참전용사가 한국 부산에 있는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두 차례나 더 한국에서 복무했고, 2014년 이후 여생을 부산에서 보냈습니다. 김시영 기자입니다.
유엔군사령부 의장대가 한국전쟁 미군 참전용사 보이드 왓츠(Mr. Boyd L. Watts) 씨의 유해와 성조기를 나란히 들고 입장합니다.
왓츠 씨의 부인이 의장대로부터 성조기를 건네 받고, 고인이 된 남편의 유해를 장지에 묻습니다.
[녹취:효과음]
향년 88세인 왓츠 씨의 안장식이 7일 한국 부산에 있는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안장식을 지원한 한국 보훈처는 한국전쟁70주년을 맞은 올해 진행되는 첫 유엔 참전용사 안장식이라 의미가 더 크다고 밝혔습니다.
왓츠 씨는 18살이던 1950년 12월부터 1952년 1월까지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특히 그가 속했던 것으로 알려진 미 육군 7사단은 대구 지역 다리를 폭파해 개전 초 북한군의 남하를 막는 등의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같은 전공을 인정받아 한국전쟁 종군기장(Korean Service Medal)과 유엔 종군기장(United Nations Service Medal)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도중 극심한 추위로 신장 질환이 악화돼 1952년 1월 일본으로 후송된 뒤 미국으로 귀국했지만, 그 후에도 한국과의 인연은 두 차례나 계속됐습니다.
1957년 미군에 재입대한 뒤 주한미군 의정부 통신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그 뒤 미국과 독일 등에서 복무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세 번째 군 복무를 마치고 1970년에 전역했습니다.
이후 1971년 미국 텍사스 엘파소에서 한국인 부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이처럼 한국을 사랑했던 그는 2014년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건너간 뒤 남은 여생을 한국에서 지냈습니다.
한국 보훈처는1991년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20여 년 만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던 왓츠 씨가 “새로운 세상이 된 한국의 발전된 모습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고 전했습니다.
또, 그와 함께 지내던 아들은 “아버지는 자신에게 항상 자상한 사람이었고 그런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인을 회상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왓츠 씨가 안장된 유엔기념공원은 유엔이 관리하는 세계에 단 하나 뿐인 유엔군 묘지입니다.
이 곳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유엔군사령부가 한국전 전사자를 묻기 위해 처음 부산에 묘지를 조성하면서 시작됐습니다.
1951년부터 개성, 인천, 밀양, 마산 등 전국 각 지에 가매장돼 있던 유엔군 유해가 이곳으로이장되기 시작했고, 1954년까지 유엔군 전사자 약 1만 1천여 명이 안장됐습니다.
이후 일부 국가의 유해가 본국으로 재이장되면서, 현재는 미국과 영국, 터키, 캐나다 등 11개국의 한국전 유엔군 참전용사 2천 309 구의 유해가 안장돼 있습니다.
1955년 11월 한국 국회는 이 곳을 유엔에 영구 기증하기로 의결했고, 1959년 11월 유엔과 한국 간의 협정으로 ‘재한(在韓)유엔기념묘지’로 정식 명명됐습니다.
이후 2001년 3월 유엔기념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돼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전 참전용사에 대한 유엔기념공원 개별 안장은 유가족의 희망에 따라 이뤄지며, 2015년 5월 프랑스 참전용사 고 레몽 베르나르 씨 이후 이번이 11번째입니다.
VOA뉴스 김시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