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여성 항공기 조종의 선구자, 1900년대 미국 최고의 스피드 비행 선수, 여성 최초의 초음속 비행사, 2차 대전 중 여성 조종사 부대, 와프스(WASP)의 창설자 등으로 명성을 날린 재키 코크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재키 코크란은 그 시대 여성으로써 누구보다 먼 거리, 더 높이, 더 빨리 비행을 기록한 조종사였습니다. 재키 코크란의 본명은 재클린 코크란입니다. 재키는 자신이 1910년에 태어났다고 말했지만 어린 아기였을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것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어린 재키는 다른 부부가 입양하고 양부모가 됐습니다. 양부모 가정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이들은 플로리다 주와 조지아 주에서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재키는 학교에 간 것이 단 2년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면직물 공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8살인 그녀가 받은 돈은 시간당 단 6센트였습니다.
그후 재키는 간호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미용사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재키는 미용학교에서 기술을 배운 다음 남부 여러 곳의 미용실에서 일했습니다. 재키는 이어 뉴욕 시로 옮겨 유명한 미용실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일 때문에 출장을 다니던 재키는 플로이드 오들럼 (Floyd Odlum)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금융전문가로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플로이드는 재키에게 비행기 조종을 배워보라고 권했습니다. 플로이드는 재키가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는데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재키는 자신이 개발한 미용제품을 파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심각한 경제난, 즉 대공황을 겪고 있었습니다. 프로이드는 재키에게 미용제품을 팔아 기업인으로 성공하기는 너무나 어렵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성공하려면 재키는 자신의 제품을 미국 전역에서 팔수 있어야 했습니다. 플로이드는 그러려면 비행기를 타고 다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재키는 플로이드의 말에 그것이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재키 코크란은 당시 친구들에게 비행기 조종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건지 알기나 하냐고 경고를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재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종술을 배우기 위해 뉴욕의 롱아일랜드에 있는 루즈벨트 비행장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두 주 반 동안 교육을 받은 다음 재키는 조종사 면허증을 받았습니다. 재키는 그것을 받자마자 캐나다 몬트리올로 가는 항공기를 조종했습니다. 그때가 1932년이었습니다. 3년 후 재키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까지 비행하는 벤딕스 트로피 경기(Bendix Trophy Race)에 출전했습니다.
그 대회는 남녀 조종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대회에 처음 출전한 코크란은 비행기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로 인해 코크란은 완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 대회에 출전한 유명한 다른 여 조종사 아멜라 어하트는 5위를 차지했습니다.
1936년 재키와 플로이드는 결혼했습니다. 재키는 자신의 사업체인 ‘재클린 코크란 화장품 회사’를 계속 운영했습니다. 플로이드는 재클린이 비행을 하며 사업을 계속하도록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1937년 아멜리아 어하트는 세계일주 비행을 시도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어하트는 비행중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여 조종사들은 그녀를 위한 추모행사를 열었습니다. 재키 코크란은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그녀의 비극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을 유감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목표를 계속 이어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하트가 실종된 것으로 발표된지 한달 후 코크란은 다시 벤딕스 트로피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여성 조종사는 그녀 뿐이었습니다. 코크란은 내노라 하는 여러 남성 조종사들을 앞지르고 3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때 우승을 차지한 사람은 알렉산더 세버스키가 설계한 신형 군용 비행기를 몰았습니다. 세버스키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세버스키는 자신이 개발한 신형 장거리 비행기를 미 육군 항공대에 팔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항공기를 여성이 조종해 대회에 참석하면 더 관심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번 대회에 코크란에게 조종을 제의했고 코크란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세버스키는 추가의 연료 컨테이너를 날개에 달았습니다. 중간에 쉬지 않고 장거리를 주행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설계의 비행기를 몬 최초의 조종사가 코크란이 된 것입니다. 대회에 앞서 21명의 조종사들이 시험비행을 했습니다. 그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조종사는 코크란과 다른 남성 조종사 9명이었습니다.
대회는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에서 밤중에 열렸습니다. 조종경기를 보러 모여든 사람은 4만명이 넘었습니다. 코크란이 조종하는 세버스키의 비행기는 활주로를 미끌어져 나갔습니다. 은빛 날개와 동체는 비행장 주위의 불빛에 눈부시게 반사됐습니다. 비행기는 이륙을 하고 어둠 속으로 솟구쳤습니다.
또 다른 구경꾼들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모여 있었습니다. 종착지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첫 번째로 도착하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리고 결승선에 도달하는 걸 보며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바로 코크란이 조종하는 은빛 비행기였습니다. 코크란은 3천 270 Km를 8시간 10분에 걸쳐 날았습니다. 코크란은 한 번도 중간 기착 없이 전 코스를 완주했습니다. 그러나 코크란은 남은 연료가 불과 몇분 분량뿐이었다는 걸 도착 후에야 알았습니다.
그해 코크란은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코크란은 미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조종사 상인 하몬 트로피(Harmon Trophy)를 수상했습니다. 코크란은 이 상을 13차례나 더 받았습니다. 다음 해인 1939년, 유럽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습니다. 코크란은 여성도 전쟁에 도움을 줄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 조종사들에게는 군 수송기 비행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남성 조종사들이 더 많이 전투기 조종에 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1940년, 코크란은 자신의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 미 육군항공대 지원을 추진했습니다. 코크란은 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 엘리노어 여사에게 서한을 보냈습니다. 코크란은 전쟁 중 훈련된 조종사가 부족한 것 처럼 보인다면서, 여성들 가운데도 잘 훈련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그후 코크란에게는 런던으로 가서 새로 설치된 영국 항공 수송대 여성 조종사 훈련을 지원하라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코크란은 여러 해 런던에서 활동했습니다.
1943년이 되자 미국은 더 많은 조종사가 필요하게 됐습니다.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몬드 장군은 영국을 방문한 길에 코크란을 만나 미국으로 돌아와 여 조종사 양성계획을 짜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렇게해서 등장한 조직이 여성 공군 서비스 파일럿(Women Airforce Service Pilots), 약칭 와스프(WASP)였습니다. 이 그룹은 2년 동안 존재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때 여성들은 77종의 각종 항공기 조종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비행한 거리는 총 백만 킬로미터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정식 군 조직이 아니었기에 여성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직원 신분이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나자 미국 정부는 코크란에게 WASP를 조직한 공로로 Distinguished Service Medal, 즉 수훈 근무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민간인으로써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습니다. 전쟁 후 코크란은 아놀드 장군과 함께 일했습니다. 코크란은 미 공군 예비군 창설을 위한 법안을 기초했습니다. 공군 예비군의 첫 멤버도 코크란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코크란은 정식 군인 신분을 얻게 됐습니다.
1940년대 말, 코크란은 비행 대회에 다시 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비행 신기록을 수립했습니다. 1944년, 코크란은 제트기 시대를 맞았습니다. 1954년에는 캐나다 정부가 그녀에게 새로운 전투기 시험 비행을 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때 그녀는 여성 최초로 음속을 돌파하는 비행 기록을 수립했습니다. 1960년대 초에는 락히드 마틴 사의 테스트 파일럿이 됐습니다. 이때 코크란은 시속 2천 286Km를 비행했습니다. 그것은 음속의 두 배나 되는 빠른 속도였습니다. 여성 파일럿으로는 최고의 비행 속도였습니다.
재키 코크란은 1964년 자신의 미용제품회사를 매각했습니다. 그 뒤 나이 70이 된 1980년 코크란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까지도 코크란은 남녀를 막론하고 가장 빠른 속도, 가장 고도의 비행, 가장 긴 거리를 비행한 조종사의 기록을 갖고 있었습니다.
재키 코크란은 하늘을 집으로 느끼며 살았습니다. 코크란은 하늘을 나는 기분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대기의 아래 부분만을 알고 있다. 위로 오르고 또 오르면 하늘은 어두워진다. 아주 높이 올라가면 낮에도 별을 볼 수 있다. 나는 바람, 그리고 별과 함께 여행을 했다.”
이 시간에는 여성 최초의 초음속 비행사 재키 코크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