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벌 로웰은 뉴잉글랜드라 불리우는 미국 동북부 전통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로웰의 가족이 처음 신대륙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로 온 것은 1639년이었습니다. 퍼시벌 가문은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 미국 의류 업계의 영향력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퍼시벌의 아버지 어거스터스 로웰(Augustus Lowell)은 매사츄세츠 주 보스톤에서 피복 제조업을 했습니다. 퍼시벌은 그곳에서 1855년 태어났습니다. 아래로는 남동생 애버트(Abbott Lawrence)와 누이동생 에이미(Amy)가 있었습니다. 퍼시벌은 젊었을 때 미국과 유럽의 사립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두뇌가 명석한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가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1876년 하버드를 마치고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기 위해 1년 동안 유럽과 중동을 여행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할아버지의 의류회사에서 경리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몇 년 동안 그 일을 한 퍼시벌은 자신이 사업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일본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기 위해 그곳으로 갔습니다. 일본에 있던 중인 1883년, 조선은 미국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 위해 보빙사를 보냈습니다. 보빙사는 중간에 일본에 들렀을 때 주일 미국 공사의 주선으로 퍼시벌 로웰을 만났습니다. 그 인연으로 퍼시벌은 그해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퍼시벌 로웰은 고종도 예방했습니다. 고종은 로웰에게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관직을 주고 외교업무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퍼시벌은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민중들이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는 등 혼란상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로웰은 10년 동안 동 아시아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6권에 달하는 동아시아 관련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퍼시벌 로웰은 외교관이었지만 수학과 천문학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1893년 로웰은 미국으로 돌아와 화성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명한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지오바니 쉬아파렐리(Giovanni Schiaparelli)로부터 천체 관측을 배웠습니다. 그는 쉬아파렐리가 화성에 있는 모종의 흔적에 대해 써 놓은 기록을 보았습니다. 로웰은 쉬아파렐리가 “카날리” (canali), 즉 운하라고 이름 지어놓은 그 흔적은 분명 어떤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만들어 놓은 것이라 믿었습니다.
1894년 로웰은 미국 서남부 아리조나 주 플래그스태프(Flagstaff) 해발 2,210미터 고지에 천문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망원경 제조사 알반 클라크 앤드 손스(Alvan Clark and Sons)에 고성능 망원경을 주문해 이곳에 설치했습니다. 로웰은 처음, 오직 화성 관찰을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가 그 다음에는 금성, 수성으로 옮겨갔습니다. 로웰은 1895년 화성에 관한 첫 번째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에서 로웰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화성 표면 전체에 운하를 만들었다는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그의 이론은 화성인들이 적도의 따뜻한 곳으로 물을 옮기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로웰의 이론은 당시로서는 진지한 과학자들의 연구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화성의 생명체에 대한 그의 이론은 공상과학소설 작가들에게 오랫동안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웰의 책이 나온지 3년 후 H-G 웰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 “세계의 전쟁” (War of the Worlds)을 발표했습니다. 화성인들이 지구를 공격해 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H-G 웰스는 화성인들이 건조하고 황량한 곳에서 산다고 상상했습니다. 그것은 로웰이 하는 말과도 아주 비슷했습니다. 로웰의 화성 이론은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스(Edgar Rice Burroughs)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버로우스는 소설 “타잔”으로 유명한 작가였습니다. 버로우스는 화성에 간 미국 남성이 아름다운 공주와 사랑에 빠진다는 연작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1912년 시작된 인기 있는 그 연작 소설의 이름은 “화성의 공주”(The Princess of Mars)였습니다.
한편 로웰의 또 다른 저서 “화성과 그 운하들”( Mars and Its Canals)은 1906년에 나왔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화성의 생명체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화성 표면에 계절의 변화가 있음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또 연중 어느 때 화성표면이 어두워지는 것은 나무가 자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화성 생명체 이야기는 대단히 세심해 도시의 위치, 운하의 물길 등을 지도로 그려 보여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퍼시벌 로웰은 그가 보았다는 화성의 흔적들이 그의 시력 문제 때문이란 걸 몰랐습니다. 전문가들은 대기중에 있는 바람의 움직임과 사람 눈의 밝기가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퍼시벌 로웰은 해왕성의 인력도 연구했습니다. 해왕성의 움직임에 작은 변화만 와도 여러 천문학자들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혹성이 해왕성의 궤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습니다. 로웰은 그 혹성을 플래넷 X라 불렀습니다. 로웰은 플래넷 X를 1905년부터 2년 동안 연구했습니다. 그는 하늘의 같은 부분을 몇 주 사이를 두고 사진으로 찍어 비교했습니다. 과학자들은 그렇게 해서 태양계의 특정 물체가 이동한 사실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첫 조사는 실패했습니다. 그는 몇 장의 사진을 비교해 보았지만 플래넷 X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뒤에 다시 플래넷 X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916년 11월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끝내 플래넷 X를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로웰 천문대에서 플래넷 X를 찾는 일은 그 후 여러 해 동안 재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925년 퍼시벌의 친척인 가이 로웰이 그 천문대를 운영하게 됐습니다. 가이 로웰은 퍼시벌이 중단했던 혹성 수색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 후 퍼시벌의 동생 애벗 로렌스가 자금을 제공해 1929년 초 특수 망원 사진기가 설치됐습니다. 그해 관측소 관리인 V.M. 슬리퍼 (V.M. Slipher)는 클라이드 텀바우 (Clyde Tombaugh) 라는 젊은 과학자에게 이 특수 사진기 일을 맡겼습니다.
텀보우는 로웰 천문대에 자신이 관찰한 목성과 화성 그림을 보내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관측소에 새로 설치된 망원경 사용법을 신속하게 익혀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텀바우는 빈틈 없는 관찰 계획을 세운 다음 그에 따른 연구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습니다. 관찰 1년도 채 안된 1930년 2월 18일, 그는 대단히 특이한 물체를 발견했습니다. 그 물체는 멀리 있는 혹성 처럼 하늘에서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바로 퍼시벨 로웰이 그토록 찾으려 애썼던 플래넷 X였습니다.
3월 13일, 클라이드 텀바우와 V.M. 슬리퍼는 새로운 혹성의 발견 사실을 공표했습니다. 그 날은 퍼시벌 로웰의 75세 생일날이기도 했습니다. 텀바우는 그후 13년 동안 새 혹성의 움직임을 관찰 기록했습니다. 그는 태양 주위를 도는 7백개가 넘은 작은 물체, 즉 소행성들도 발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갤럭시라 불리우는 여러 개의 은하가 있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퍼시벌 로웰은 살아있는 동안 천문학에서 자신이 찾았던 것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플래넷 X, 즉 명왕성을 다시 찾아내기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미 항공우주국 NASA가 1965년 발사한 화성 탐사선 마리너 4호에 의해 그가 주장했던 화성의 운하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로웰이 아리조나의 플래그스태프에 건설한 천문대는 명왕성 발견 외에도 많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V.M. 슬리퍼는 이곳에서 우주가 계속해서 확대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천왕성 주위에 띄가 둘러져 있다는 것이 발견된 곳도 바로 로웰의 천문대였습니다. 로웰 천문대는 오늘날 네 대의 천체 망원경을 설치하고 일반인들이 천문학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로웰 천문대는 다른 여러 천문대들과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외에 어디엔가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는지를 계속 찾고 있습니다. 퍼시벌 로웰의 과학탐구 정신은 오늘날과 같은 광범위한 천문학 연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인물 아메리카 이 시간에는 미국 천문학 연구의 역사를 바꾼 퍼시벌 로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