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노시창입니다.
심현지입니다. 이 시간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이른바 인디언의 연방자치국을 세우려고 투쟁했던 쇼니 족 추장 테쿰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테쿰세는 북서 통치령, 즉 Northwest Territory로 불리웠던 곳, 즉 오늘날 미국과 캐나다 경계를 이루고 있는 5대호 일대에 백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인디언의 자치국을 수립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5대호 지역은 미시간 호, 이리 호, 수피어리어 호, 온타리오 호, 휴런 호 등 5개의 거대한 호수가 집결돼 있는 지역을 말합니다.
테쿰세는 모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부족 간의 서로 다른 점을 받아들이고 하나로 뭉치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대지와 문화, 자유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테쿰세는 자신을 따르는 인디언 전사들을 이끌고 여러차례 백인 군대를 물리쳤으며, 미국 독립군을 진압하려는 영국군 편에 서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테쿰세는 1768년, 지금의 미국 중부 북쪽에 있는 오하이오 밸리(Ohio Valley)에서 쇼니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푸케신와( Puckeshinwa), 어머니는 메토아타스케( Methoataske) 였습니다.
쇼니족 인디언은 미국 동북부 광대한 수림지대에 살던 원주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알공퀸어라 불리우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들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오하이오 주 남부 지역이었습니다. 17세기에 이르러 쇼니 인디언은 일리노이, 메릴랜드, 델라웨어, 펜실배니아 주 일대에까지 퍼져 살고 있었습니다. 일리노이 한 곳만 해도 북한 땅 전체보다 넓은 15만 제곱 Km나 되니 전체 영역이 얼마나 넓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커다란 유성이 떨어져, 테쿰세, 즉 인디언 말로 ‘유성(流星)’ 또는 ‘별똥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테쿰세가 어렸을 때 이모인 테쿠마피스는 쇼니 족의 문화적 근본을 가르치고, 형인 치시카우는 그를 용맹한 전사로 훈련시켰습니다. 10대가 되자 태쿰세는 쇼니 족과 그들이 사는 땅에 대한 백인들의 거듭되는 잔혹행위와 탈취를 보고 아메리칸들에 극도의 반감을 갖게 됐습니다. 테쿰세는 불과 12살 때부터 백인과의 전투에 직접 뛰어들어 싸웠습니다. 동시에 일부 인디언들이 백인들에게 가하는 잔인한 행동애 대해서도 혐오와 공포를 느꼈습니다.
아버지 푸케신와는 1774년 버지니아 민병대와의 전투에서 사망했습니다. 포인트 플레젠트 전투, 또는 던모어 공의 전투로 알려진 싸움에서였습니다. 전투에서 패배하자 어머니는 테쿰세와 그의 남매들을 동생에게 맡기고 추종자들과 함께 530여 킬로 떨어진 남부 미조리로 피신했습니다. 1780년대 말, 테쿰세는 여러 차례 백인 정착민 공격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형 치시카우 및 일부 쇼니 전사들과 함께 남쪽인 테네시로 내려가 체로키 치카마우가 족과 합세했습니다. 그러던 중 형 치시카우가 살해됐습니다. 이에 따라 테쿰세는 쇼니 파 전사의 우두머리가 됐습니다.
테쿰세는 미국 군대와 싸우는 블루재켓 추장을 돕기 위해 오하이오로 돌아왔습니다. 테쿰세는 1791년 추장 블루 재켓의 지휘에 따라 정찰대를 이끌고 와바쉬에서 벌어진 전투에 나가 미군 아더 세인트 클레어 장군 부대를 격파했습니다. 그는 뒤를 이어 마우미 강 일대에서 벌어진 쓰러진 나무 전투, Battle of Fallen Timbers에서 앤토니 웨인 장군 부대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인디언들은 이때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전투가 계속되자 양측은 그린빌 협약을 체결하고 싸움을 멈추었습니다. 이 협약에서 인디언은 그들의 땅 노스웨스트 테리토리 대부분을 백인 정부에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테쿰세는 이 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땅은 테쿰세 부족만이 소유한 땅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모든 인디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땅이었고 어떤 방식으로도 협상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조약을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800년대 초가 되자 테쿰세는 존경받는 인디언 지도자가 됐습니다. 싸움터에서는 지휘관이었고, 웅변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동생 라라웨티카는 인디언의 고유문화와 전통을 강조하는 정신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름을 텐스크와타와로 바꾸고, 스스로를 선지자라 선언했습니다.
이 선지자는 1806년 일식을 예고하고 그것이 일치하자 여러 부족으로부터 추종자들이 쇄도하고 그들로부터 지도자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는 테쿰세와 함께 여러 부족 연맹체를 이끌고 와바쉬와 티페카노이 강 부근, 오늘날의 인디애나 주 프라펫즈타운 (Prophetstown)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들 형제는 힘을 합쳐 프라펫즈타운을 쇼니 족의 본거지로 조성했습니다.
테쿰세는 더 나아가 대규모의 저항운동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테쿰세는 여기서 전쟁의 지도자라기보다 이상을 꿈꾸는 정치 지도자로 변모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연설을 이용해 언어나 부족을 망라한 모든 북미 대륙 인디언 지역에서 의용군을 모집했습니다. 테쿰세는 침략세력을 물리치는 길은 오직 단결을 통해 미국식 생활방식을 거부하는 것 뿐이라고 열변을 토하며 인디언들을 일깨웠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알라바마 지역에서 알공킨 어와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쓰는 머스코기(Muscogee)나 크리크(Creek) 부족과 같은 열렬한 지원세력을 얻기도 했습니다.
테쿰세의 호소에 자극을 받은 크리크 족은 레드 스틱스(Red Sticks)라 불리우는 자체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고 백인 정부를 공격했습니다. 테쿰세는 치카소우, 촉타우 등에서도 원주민 저항 세력을 구성했습니다. 그같은 현상은 테쿰세가 언어와 지역을 초월하는 연맹체를 형성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테쿰세와 그의 연맹군은 영국군과 합세해 포트 미그스와 포트 디트로이트를 점령하는 등 5대호 지역의 전투를 이어갔습니다.
1810년이 되자 인디언과의 분규는 미국 정부가 당면한 최대의 현안으로 떠올랐습니다. 5대호 지역의 부족장들은 미국인들과 평화롭게 살고 백인사회에 동화돼 살자는 유혹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테쿰세는 “백인들은 인디언 땅에 들어와 권리를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나라를 판다면, 왜 공기, 거대한 바다, 지구는 팔지 않는가”라고 외쳤습니다. 테쿰세는 더 나아가 “위대한 신령은 이 모든 것을 그의 자녀들이 함께 이용하도록 만들어주신 것 아닙니까?”라고 역설했습니다.
인디언의 결속을 도모하고 지원병을 모집하는 여행을 계속하던 1811년 인디애나 테리토리의 지사이자 나중에 대통령이 된 윌리암 헨리 해리슨이 프라펫즈타운을 파괴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접근해 들어왔습니다. 테쿰세는 동생에게 인디언 연맹군이 제대로 진용을 갖추기 전에는 싸움을 하지말고 기다리라고 경고했습니다. 또 양측간에는 임시 정전협정이 맺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프로펫은 이를 무시하고 해리슨 부대를 공격했습니다. 티피카노 전투(Battle of Tippecanoe)로 불리우는 처절한 싸움이 두 시간 이상이나 계속된 끝에 인디언 군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싸움에서 패한 인디언들은 프라펫즈타운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들이 도망가자 미군은 마음 놓고 이 타운을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워버렸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다음 프라펫즈타운에 돌아온 테쿰세는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그동안 그토록 힘들게 구성해 놓은 연맹의 조직조차 와해돼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남아있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1812년 전쟁에 가담했습니다.
1812 전쟁이란 1812년 6월 18일부터 1815년 2월 17일까지 벌어진 미국과 영국의 전쟁을 말합니다. 그때 테쿰세는 미시건 주에 있는 영국군과 합세해 디트로이트 함락작전으로 불리우는 전투에서 미국군을 타격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디트로이트가 함락되자 테쿰세는 영국군의 헨리 프록터 소장 부대와 합세해 캐나다 쪽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오늘날의 캐나다 온타리오 지역이었습니다. 테쿰세는 미군 해리슨 군대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테쿰세는 1813년 10월 5일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테쿰세는 존경받는 지도자였고, 강력한 추장이었습니다. 거기에다 타고난 웅변가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노스웨스트 테리토리 범 인디언 연맹의 와해를 가져왔습니다. 테쿰세와 같은 지도자가 사라지자 이 지역에 남아있던 대부분 인디언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옮겨지고 그들의 땅은 사라졌습니다.
테쿰세가 인디언 부족들을 연합하려는 목표를 결코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력이 미국 군대를 물리치고 인디언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당시 아머스버그의 영국군 사령관 아이작 브록 장군은 테쿰세의 생애를 회고하며 “그보다 더 통찰력 있고 용감한 전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찬탄했습니다.
그의 철저한 반 유럽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테쿰세는 인디언 원주민에게도 백인 미국인에게도 전설적인 영웅으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 때 북군의 명장 윌리암 셔먼 장군도 그의 이름에 테쿰세를 넣어 자신의 정식 이름을 윌리암 테쿰세 셔먼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1944년 아메리카 인디언 전국 총회 National Congress of American Indians가 결성됨으로써 모든 인디언을 연합한다는 테쿰세의 꿈은 어느 정도는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시간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의 연방국가 수립을 위해 투쟁했던 쇼니족 추장 테쿰세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