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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국가의 가사를 쓴 변호사, 프란시스 스콧 키


[인물 아메리카] 미국 국가의 가사를 쓴 변호사, 프란시스 스콧 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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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미국 국가의 가사를 쓴 인물은 변호사이자, 작가이며 시인인 프란시스 스콧 키였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노시창입니다.

이은경입니다.

지금 들으시는 노래는 “오, 그대는 보이는가, 이른 새벽 여명 사이로”로 시작되는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 'The Star-Spangled Banner'입니다. 인물 아메리카, 이 시간에는 미국 국가의 가사를 쓴 사람은 누구이고 어떻게 해서 이 글이 쓰여졌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국가의 가사를 쓴 인물은 변호사이자, 작가이며 시인인 프란시스 스콧 키였습니다.
프란시스 스콧 키는 1812년 미국과 영국과의 전쟁때 미국 동부 발티모어 항의 포트 매킨리 기지에 영국군이 하루 종일 포를 쏘아댔으나 끝까지 기지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데 감명을 받아 시를 써 내려갔고, 그 시가 나중에 미국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의 가사가 됐습니다.

프란시스 스콧 키는 1779년 메릴랜드 주 프레데릭 카운티, 테라 루브라라 불리우는 대규모 장원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란시스 스콧 키는 메릴랜드주 애너폴리스에 있는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삼촌인 필립 바톤 키한테서도 법률을 배웠습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 독립을 쟁취한지 얼마 되지 않은 1810년대 초, 영국은 미국 해군 병사들을 납치하는가 하면 프랑스와의 교역을 방해하는 사건 등으로 미국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 갈등은 급기야 이른바 1812년 전쟁이라 불리우는 무력충돌로 비화하고 말았습니다. 프란시스 스콧 키는 그 당시 신생국 아메리카 합중국의 조지타운 경 포병부대에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시스 스콧 키는 종교적인 신념에다, 서로 다른 주장은 협상으로 해결될수 있다고 믿었기에 무력 사용은 원치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영국군은 1814년 워싱턴 디시를 함락했습니다. 당시 영국군이 포로로 한 미국인들 중에는 키의 동료이자 의사인 윌리암 비인스 박사가 있었습니다. 프란시스 크콧 키는 검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빈스의 석방을 위한 협상을 맡게 됐습니다.

키는 존 스키너 미군 대령과 함께 협상을 위해 발티모어로 향했습니다. 발티모어는 체사피크 만에 접해 있는 도시이고, 그곳에는 영국 군함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키와 스키너는 영국 군함에 승선해 빈스 박사의 석방 교섭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포트 매켄리 기지를 포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바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돌아가면 그 계획이 누설될 것을 염려해 공격이 끝난후 풀어주려 한 것입니다.

1814년 9월 13일과 14일 아침까지, 프란시스 스콧 키 일행은 25시간 동안이나 미군의 포트 매킨리 요새에 영국군 포화가 퍼부어지는 것을 불안 속에 지켜봐야 했습니다. 키는 밤새도록 계속되는 포격에 미국 기지는 초토화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포격이 멈춘 새벽, 자욱한 연기 속에 미국 기가 여전히 펄럭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키는 그 순간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한 편지의 뒷면에 그 감동을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오 그대, 보이는가 펄럭이는 저 깃발을,,,
당시 그 성조기는 기지 사령관 조지 아미스테드 소령의 요청에 의해 매리 영 피커스길(Mary Young Pickersgill) 이라는 여성이 손수 바느질을 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아미스테드 사령관은 먼 거리에서도 영국군의 눈에 띄도록 초대형 기를 달았던 것입니다.

영국군은 진지 포격을 끝내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키는 다음날, 자신이 묵었던 호텔에 들어가 계속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에 바탕을 둔 시는 “Defence of Fort M'Henry” 즉 매킨리 요새의 방어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3절로 된 이 시는 Baltimore Patriot이라는 신문을 비롯해 여러 신문과 전단지 등에 실려 퍼져나갔습니다.

이 시는 존 스태포드 스미스가 작곡한 To Anacreon in Heaven 즉 '천상의 아나크레온에게’라는 곡에 붙여 애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곡은 사람들이 주로 술을 마시며 부르던 곡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차츰 전국으로 퍼지면서 곡명도 새로 The Star-Spangled Banner로 붙여졌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상징으로 계속 연주되고 불리웠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미국의 국가로 채택되지는 않았습니다.

논란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비판적인 측에서는 가사가 너무 폭력적이고, 부르기가 힘들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가운데서도 1916년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은 이 노래를 공식 행사때마다 연주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1931년 3월 3일, 의회의 결정에 동의해 이 곡을 국가로 선포했습니다. 무려 100년이 넘게 미국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끝에 정식 국가로 공식 지정이 된것입니다. 성조기여 영원하라 1절, 가사 해석과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오, 그대는 보이는가, 이른 새벽 여명 사이로
어제 황혼의 미광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환호했던,
넓직한 띠와 빛나는 별들이 새겨진 저 깃발이, 치열한 전투 중에서도
우리가 사수한 성벽 위에서 당당히 나부끼고 있는 것이.
포탄의 붉은 섬광과 창공에서 작렬하는 폭탄이
밤새 우리의 깃발이 휘날린 증거라.
오, 성조기는 지금도 휘날리고 있는가
자유의 땅과 용자들의 고향에서!

프란시스 스콧 키는 국가의 가사를 쓴 후에도 워싱턴 디시에서 법조인으로 일했습니다. 키가 워싱턴 디시와 메릴랜드에서 법조계에서 활동한 기간은 40여년이 넘었습니다. 그는 앤드류 잭슨 대통령 재임중 DC 검사로 임명돼 1833년에서 1841년까지 재임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미국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 대형 사건들을 많이 다루었습니다. 키는 진지한 성공회 신자이기도 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키가 인종 문제에서 이중적인 면을 보인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키는 1800년부터 노예를 소유했습니다. 워싱턴 디시 정부의 검사직에 있으면서 그는 미국의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태도를 유지했고,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기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노예제도란 죄악으로 가득찬 것이며 고문의 바탕이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자유의 땅이고 억압받은 자들의 고향이라고 말해 노예반대운동가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는 1800년대 일부 노예를 풀어주었습니다. 그중 한명은 다른 노예를 감독하는 농장 관리인으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사망할때 8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내 흑인을 아프리카로 보내기 위한 미국식민협회 ACS의 설립에도 참여했고 지도자이며 핵심 멤버였습니다.

ACS는 해방된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보내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미국 땅에서 태어난 흑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가들은 당시 미국 상류층 시민들에게는 아메리카가 다른 인종이 섞여 사는 나라가 된다는 걸 상상조차 못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키도 바로 상류층 인사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노예들을 해방하면서도 아프리카로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ACS는 대부분의 노예해방운동 세력이나 흑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ACS는 1847년 아프리카에 라이베리아라는 나라를 수립하는데 주도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1830년대 초 미국인들의 노예제에 대한 생각은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ACS의 사업에 대한 반대도 늘어났습니다.

극히 소수의 흑인들만 아프리카로 갔고, 간 사람들도 서 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에 많은 수가 사망했습니다. 자유인이된 흑인들은 아프리카로 가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차라리 미국을 떠나려면 캐나다나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키를 포함한 ACS 의 핵심 멤버들은 흑인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 보다는 노예제 유지를 더 선호했습니다.

프랜시스 스콧 키는 연로해지면서 늑막렴에 걸려 1843년 1월 11일 발티모어에서 타계했습니다. 향년 63세였습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의 가사를 쓴 파란시스 스콧 키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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