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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영화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명 감독, 빌리 와일더


[인물 아메리카] 미국 영화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명 감독, 빌리 와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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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많은 영화 전문가들은 미국 영화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인물이라면 흔히 빌리 와일더 감독을 꼽고 있습니다. 이들은 와일더가 헐리우드가 낳은 최우수 영화 제작자라고 말합니다. 와일더는 사회적으로 극히 예리한 문제와 남녀간의 성 문제를 다루었고, 그런 주제를 내세운 최초의 감독이었습니다.

많은 영화 전문가들은 미국 영화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인물이라면 흔히 빌리 와일더 감독을 꼽고 있습니다. 이들은 와일더가 헐리우드가 낳은 최우수 영화 제작자라고 말합니다. 와일더는 사회적으로 극히 예리한 문제와 남녀간의 성 문제를 다루었고, 그런 주제를 내세운 최초의 감독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사이 빌리 와일더는 약 50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20여 차례나 아카데미 영화제의 수상 후보로 올랐습니다. 그리고 여섯 차례 오스카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영화는 미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가 만든 유명 영화 중에는 "선셋 대로” (Sunset Boulevard),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 "이중 배상” (Double Indemnity) 등이 있습니다. 그는 또 "잃어버린 주말” (The Lost Weekend), "The Apartment", "7년만의 외출”(The Seven Year Itch)도 감독했습니다. 빌리 와일더는 1906년 구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현 폴란드의 일부로 돼 있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새무엘 와일더였습니다. 어머니 오이게니아 디틀러는 어렸을 적 미국에서 몇 년을 보낸 적이 있는 분으로 미국식을 좋아해 아들을 빌리로 불렀습니다.

빌리 와일더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법률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다 변호사의 꿈을 버리고 신문사의 기자로 들어갔습니다. 1920년대에는 독일에서 영화 대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유태인인 와일더는 자신의 장래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1933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감독했습니다. 나쁜 종자라는 뜻의 The Bad Seed였습니다.

그러자 미국의 프로듀서들이 그의 대본들을 환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곧장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1934년 미국에 도착했을 때 수중에는 단돈 11달러가 전부였습니다. 빌리 와일더는 영화산업의 중심인 캘리포니아의 헐리우드로 갔습니다. 당시 그곳에는 독일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와일더의 일자리를 찾아주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와일더는 찰스 브레키트 (Charles Brackett) 와 팀을 이루어 영화대본을 썼습니다. 함께 여러편의 영화도 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편의 인기 높은 영화 대본을 썼습니다. 그중 하나가 1939년에 나온 그레타 가르보 (Greta Garbo)주연 영화 니놋츠카 (Ninotchka)였습니다. 감독은 언스트 루비취 (Ernst Lubitsch)였습니다. 와일더는 언스트의 유머와 뛰어난 감독의 전문성에 큰 영향은 받았고, 늘 그를 친구이며 스승으로 존경했습니다. 와일더는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있어 영화의 수도인 헐리우드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녀의 관계를 극히 특이한 방식으로 풀어나갔습니다. 그 중 하나가 크게 호평을 받은 이역의 하늘 아래 (Hold Back the Dawn)입니다.

이 영화는 루마니아인 주인공이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멕시코에서 미국 여성과 위장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여성에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특이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헐리우드의 일반적인 로맨스와는 아주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1944년 빌리 와일더는 이중 배상을 제작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영화가 그를 헐리우드의 가장 뛰어난 감독의 한 명으로 자리잡게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영화는 보험금을 노리고 고객 중 한 명의 아내와 보험 판매원이 벌이는 잔인하고도 처절한 이야기입니다.

빌리 와일더는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자주 헐리우드의 전형을 벗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알콜 중독자의 이야기가 영화의 주제가 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와일더는 1945년 잃어버린 주말이라는 영화에서 과음하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주인공은 부인하지만 사실 술이 작가의 삶을 조종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의 보도들은 알콜 음료 제조사들이 이 영화를 개봉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영화가 아픈 이야기이지만 정직한 내용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또 이 영화에 출연한 레이 밀런드는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 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와일더는 각본상과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프랑스의 깐느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와일더는 1939년 미국 시민이 됐습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자 미국 정부는 와일더에게 독일로 가 영화와 라디오 방송을 새로 추진하도록 요청했습니다. 나치 독일은 두 가지 미디어를 정치 선전에 적극 이용했었습니다. 독일에 있는 동안 와일더는 나치 당국이 자신의 어머니, 누이를 살해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1950년 와일더는 영화 선셋 대로를 제작했습니다. 무성영화시대의 나이 든 여배우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옛날의 영광을 꿈꾸며 영화계로 다시 들어오고 싶어하는 이 여성과 야심적인 각본가 등이 벌이는 영화계의 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역은 글로리아 스완슨이 맡았습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각본상, 미술상, 음악상 등을 받은 명작이었습니다. 미국 영화연구소는 이 영화를 100대 우수 영화의 하나로 지정했습니다.

와일더의 제 17 포로수용소도 여러 분야의 아카데미상을 받은 명작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전쟁시의 리얼리즘과 유머가 혼합된 것이었습니다. 주연인 윌리암 홀덴은 최우수 남우상, 와일더는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1954년 와일더는 여러 해 동안 몸 담았던 영화사 파라마운트를 나와 독립 제작자가 됐습니다. 파라마운트사가 영화 속의 반 나치독일 대사들을 삭제해버린 것도 결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독립한 다음 해 나온 와일더의 7년만의 외출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조지 액셀로드(George Axelrod)의 희곡을 각색한 이 영화는 결혼한 남성이 금발의 젊은 미녀와 사귀기 위해 부인을 속이려 하는 내용입니다. 젊은 여인 역은 마릴린 몬로 (Marilyn Monroe)였습니다. 비평가들은 마릴린 몬로가 이 영화로 헐리우드의 대 스타로 발돋음을 했다고 평했습니다. 또 마릴린 몬로가 빌리 와일더 감독하에서 그녀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다고 평했습니다.

1959년 와일더 인기 높은 희극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I.A.L. 다이어몬드와 함께 극본을 쓴 “뜨거운 것이 좋아”였습니다. 이 영화는 두명의 재즈 음악인이 범죄자들에 쫓기는 이야기입니다. 음악인 역은 토니 커티스(Tony Curtis)와 잭 레먼(Jack Lemmon)이 맡았습니다. 이들은 여자 옷을 입고 여성 밴드에 합류했습니다. 그 밴드 멤버 중 한 명으로 마릴린 먼로가 있었습니다. 먼로는 커티스와 레먼이 자신을 진짜 음악인으로 믿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MARILYN MONROE: "I'm Sugar Kane. My mother was a piano teacher and my father was a conductor")
이-“나는 슈거 케인이라고 해요. 우리 어머니가 피아노 선생님이었고 아버지는 지휘자였어요.”

빌리 와일더는 1960년대와 70년대 흥미있는 여러 편의 영화를 계속 만들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사회적 현상과 성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작가들이나 감독들도 그런 주제들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가 되자 와일더는 더 이상 헐리우드의 특이하고 창의적인 영화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와일더는 많은 상을 받고 명예를 누렸습니다. 미국 영화 아카데미는 1987년 그에게 어빙 G. 탈버그 (Irving G. Thalberg Memorial Award)상을 수여했습니다. 이 상은 제작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이었습니다.

와일더는 2002년 95세로 타계했습니다. 그가 타계하자 헐리우드의 한 영화계는 “빌리 와일더야말로 세상 사람 누구도 잊지 못하는 영화를 만든 위대한 영화인이었다”라며 그를 추모했습니다.

인물 아메리카, 이 시간에는 미국 영화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인물로 평가되는 제작자이며 감독이고 시나리오 작가인 빌리 와일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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