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알렉산더 헨슨은 1866년에 태어나 1955년에 타계한 아프리카계 미국 탐험가였습니다. 그는 로버트 피어리와 함께 거의 23년에 걸쳐 7차례나 북극 탐험 여행을 했습니다.
매튜 헨슨이 북극 탐험에 나서게 된 것은 탐험가 로버트 에드윈 피어리의 도우미로 고용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이들은 20년 이상 함께 북극 탐험을 계속했고, 1909년 4월 6일 헨슨과 피어리를 포함한 일행이 인류 최초로 지구 최북단의 정점 가까이에 도달했다는 역사적 기록을 수립한 것입니다.
매튜 알렉산더 헨슨은 1866년 8월 8일, 미국 메릴랜드주 챨스 카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흑인 노예에서 해방된 소작농 가정이었습니다.
헨슨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비교적 가까운 거리인 워싱턴 디시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일자리를 찾아 생계를 이어가려고 했으나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식구들은 저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거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헨슨도 11살밖에 안 됐지만 멀리 떨어진 메릴랜드주 발티모어까지 걸어가 일자리를 찾아다녔습니다. 항구도시인 그곳에서 헨슨은 케이티 하인즈(Katie Hines)라는 선박의 심부름꾼으로 들어갔습니다.
선장인 칠즈(Captain Childs)는 헨슨을 자기 수하에 두고 항해에 필요한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글을 읽고 쓰는 법도 가르쳤습니다. 키티 하인즈 호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을 돌아다니며 세계에 대한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1884년 칠즈 선장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헤인즈는 워싱턴 디시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어느 모자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던 중인 1887년 헨슨은 미 해군 공병대 장교 로버트 에드윈 피어리(Robert Edwin Peary)를 알게 됐습니다. 이후 피어리에게 헤인즈는 자신의 야망인 북극 탐험을 완수하는데 뗄 수 없는 동반자가 됐습니다.
헨슨이 항해에 대해 많은 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피어리는 다가오는 자신의 니카라과 탐사 계획에 그를 보조원으로 채용했습니다. 니카라과 탐사가 끝나고 돌아오자 피어리는 헨슨에게 필라델피아에 일자리를 구해주었습니다. 헨슨은 1891년 에바 플린트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헨슨은 다시 피어리와 함께 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린랜드 탐사 계획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린랜드로 가서 탐사를 하는 동안 헨슨은 그 지역 원주민인 에스키모의 언어, 문화, 그들이 한파에서 생존하는 방식 등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1893년 또 다시 그린랜드로 갔습니다. 전 지역 얼음의 두께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습니다.
2년에 걸친 탐사여행은 위험천만한 것이었습니다. 피어리 탐사팀은 전원 먹을 것이 없어 목숨을 잃을뻔 했습니다. 그토록 힘든데도 탐사팀은 앞서 그린랜드 탐사 때 발견한 3개의 대형 유성을 수집하기 위해 1896년 1897년 그곳에 다시 갔습니다. 피어리 팀은 수집한 유성을 미국 자연사박물관에 매각해 다음 탐사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그같은 잦은 탐사로 헨슨은 가정에 충실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1897년 부인과는 이혼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후 여러 해 동안 피어리와 헨슨은 지속적으로 북극의 정점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1902년에는 6명의 에스키모 멤버들이 보급품과 식량이 떨어져 목숨을 잃는 비극도 겪었습니다.
고난의 탐험이 계속되던 중 1905년의 탐사는 다른 때보다 진전이 있는 여정이 됐습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탐사를 지원하면서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쇄빙선으로 무장을 하고 북극점에 175마일 지점까지 진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녹은 얼음 덩어리들이 바다 위를 덮어 길을 막는 바람에 탐사팀은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 무렵 헨슨은 북극지방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들 아나우아카크 (Anauakaq)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헨슨은 1906년 돌아와 루시 로스(Lucy Ross)와 결혼했습니다.
이들의 마지막 북극 탐험은 1908년 시작됐습니다. 헨슨은 이번에도 직접 썰매를 만들고 대원들을 훈련시키는 등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대원들은 헨슨이 모든 면에서 피어리보다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북극탐험은 다음 해까지 이어졌습니다. 지친 대원들은 탐험을 포기하고 되돌아갔지만 충실함의 화신같은 헨슨은 끝까지 피어리 곁에 남아 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피어리도 그가 함께한다는 믿음이 없이는 북극 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피어리는 “헨슨은 끝까지 가야했다. 그가 없다면 나는 정점에 도달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1909년 4월 6일, 헨슨은 드디어 탐험대가 북극의 정점이라고 믿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최소한 북극점에 가장 근접한 곳으로 믿어지는 자리를 미국인으로서 처음 밟은 것입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난 후 피어리가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피어리는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 내용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습니다.
처음 출발했을 때는 대원 24명, 썰매가 19대, 그리고 133마리의 개가 동원됐습니다. 그러나 그곳까지 도달한 사람은 피어리, 헨슨, 네 명의 에스키모 인들, 그리고 40마리의 개가 끄는 썰매가 전부였습니다. 이들은 돌아와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피어리는 개선장군이 됐습니다. 그는 수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흑인인 헨슨의 존재는 거의 언급도 되지 않았습니다.
피어리는 무수한 찬사를 받았지만 흥분과 동시에 그와 탐험대에 관한 의혹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북극의 극지에 성조기를 꽂았다고 알려진 그였지만 1996년에 발견된 피어리의 새로운 일지에서는 이들이 북극점으로부터 40km 떨어진 지점에 도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비록 정확한 북극점 정복은 실패했지만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북극과 가장 인접한 지역에 도달한 인물이 매튜 헨슨이었고 뒤를 이어 그 지점에 피어리가 도착한 것입니다.
북극점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는 상관없이 이들의 탐험으로 북극이 깊은 바다라는 것 등, 북극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헨슨은 북극탐험 이후 30년 동안 뉴욕에서 연방세관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1912년 회고록 ‘북극의 흑인 탐험가’ A Negro Explorer at the North Pole을 집필했습니다.
1937년, 헨슨은 70세가 돼서야 비로소 자신의 북극탐험 공적을 인정받았습니다. 뉴욕에 본부를 둔 미국의 저명한 탐험가 그룹(Explores Club)은 그를 명예회원으로 정식 추대했습니다. 1944년에는 헨슨과 그의 동료대원들이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최고 훈장인 의회 메달을 받았습니다. 헨슨은 브래들리 로빈슨과 힘을 합쳐 1947년 자서전 검은 동료, Dark Companion을 펴냈습니다. 같은 해 시카고 지리학회, Chicago Geographic Society는 헨슨에게 금메달을 수여했습니다.
매튜 헨슨은 1955년 3월 9일 뉴욕시에서 타계해 우드론 묘지(Woodlawn Cemetery)에 묻혔습니다. 1968년에는 그의 부인 루시의 시신도 그 옆에 안장됐습니다. 한편 매튜 헨슨의 공적에 존경심을 갖고 있던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7년 하버드 대학교 신경학과 교수이자 ‘문화 인종관계 연구소’ 소장인 알렌 카운터 박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헨슨 부부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로 이관하는 안을 승인했습니다. 카운터 박사는 그 자신도 아프리카를 탐험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피어리와 그의 부인 조세핀도 묻혀있습니다.
인물 아메리카, 이 시간에는 로버트 피어리의 탐험대에 들어가 최초로 북극의 정점에 가장 가까운 곳에 발을 디딘 미국인 매튜 헨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