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캘리포이나 주 샌프란시스코 부근에 명문 사립 스탠포드 대학교가 있습니다. 1885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오늘날 약 만 6천명 정도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으며, 동부의 하버드, 예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문입니다. 졸업생이나 교수 중 80여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왔을 만큼, 이 학교의 우수성은 널리 소문이 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같은 명문 대학을 설립한 기업가이자 정치인이었던 리랜드 스탠포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리랜드 스탠포드는 1824년 3월 9일, 뉴욕 주 워터블리엣에서 태어났습니다. 8남매 중 다섯째였습니다. 그는 안정된 가정 덕분에 충실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뉴욕에 있는 클린튼 리버럴 인스티튜트에서 공부를 했고, 그 다음에는 카제노비아 세미나리에서 공부했습니다. 학교를 마친 다음에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다음에는 1848년 자신도 변호사가 됐습니다.
얼마후 그는 위스컨신 주의 포트 워싱턴에서 변호사업을 개시했습니다. 그러나 1852년 사무소가 불에 타는 사고가 발생하자 스탠포드는 더 이상 변호사 일을 포기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왔습니다. 캘리포니아에는 사업을 하는 동생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스탠포드는 광부들에게 보급품 도매상을 하는 동생의 사업에 합류했습니다.
스탠포드는 사업을 하면서도 차츰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공화당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1957년에 주 재무장관에 출마했습니다. 그러나 낙선했습니다. 스탠포드는 그럼에도 정치활동을 계속했고, 1859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지사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낙선의 곱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재출마한 1861년, 경쟁당인 민주당이 분열하는 상황에서 그는 드디어 캘리포니아 주 지사로 당선됐습니다.
그가 주 지사 재임 중 취한 가장 역사적인 행동은 남북 전쟁에서 캘리포니아 주를 유니언, 즉 북부 정부의 일원으로 유지한 것이었습니다.
스탠포드는 주 지사에 당선됐을 무렵 미 대륙을 동서로 연결하는 철도 , Transcontinental Railroad건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3당시에는 미국의 철도가 동부에서 중부인 네브라스카주 오마하까지만 놓여 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먼 서부까지는 철도가 없었습니다.
남북 전쟁중이던 당시 에이브래엄 링컨 대통령은 중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대륙횡단 철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스탠포드는 콜린스 헌팅턴, 찰스 크로커, 마크 홉킨스 등과 더불어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를 차려놓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철도의 4인방으로 불리웠습니다.
스탠포드는 회사의 설립에서부터 타계할때까지 이 기업의 회장으로 재직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1862년 스탠포드의 센트럴 퍼시픽과 또 하나의 철도 회사인 유니온 퍼시픽 두 회사에 철도 부설공사를 발주했습니다. 이에 따라 센트럴퍼시픽은 총 1,086 마일, 유니언 퍼시픽은 총 689 마일의 철로를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철도 4인방은 사실 철도 사업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것도 없고, 그 사업에 투자할 자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적 수완과 인맥을 통해 사업을 추진해 갔습니다. 스탠포드는 캘리포니아 지사로써 철도 건설에 사용할 수 있도록 주 내의 공공 토지를 제공했습니다. 그 외에도 스탠포드는 정치력을 발휘해 철도 건설사업에 막대한 연방지원도 얻어냈습니다. 여기에는 철도를 놓기 위한 대지, 자금을 대기 위한 융자 등이 포함됐습니다. 스탠포드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대규모로 주식을 발행했습니다. 그 자신 대 주주로 있으면서 일반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지사 임기가 끝난 1863년, 그는 모든 힘을 철도 사업에 쏟아넣기 시작했습니다. 센트럴 퍼시픽 철도는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에서 동쪽을 향해 선로를 까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 (Union Pacific Railroad Company)는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에서 서쪽을 향해 철로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접근을 해 오던 철길은 1869년 5월 10일, 유타주 프로몬토리 포인트(Promontory Point)에서 만났습니다. 두 기차가 프로몬터리 포인트에서 연결된 극적인 순간, 공사를 하던 양쪽의 인부들은 서로 부등켜 안고 울기도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스탠포드는 큰 부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센트럴 퍼시픽의 철도 노동자들은 대부분 중국인들이었습니다. 당시는 중장비가 없이 매일 약 만 2천명이 곡괭이, 부삽 등으로 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부 지방과는 달리 서부에는 험준한 산이 많아 거대 터널도 뚫어야 했고, 깊은 계곡도 연결해야 했습니다.
거기에다 회사는 가능한 한 빨리 공사를 끝내려 서둘렀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공사를 하다 죽은 사람의 수가 철도 침목 수만큼 많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공사가 끝난지 100년이 지난 후에도 종종 당시 숨진 인부들의 유해가 발견됐으나 정확한 사망자 통계도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대륙횡단 철도건설이 끝나자 스탠포드와 그의 측근들은 또 다른 철도와 수로 건설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이들은 경쟁사인 캘리포니아 퍼시픽 철도, 샌 프란시스코-산 호세 라인 등을매입했습니다. 또 캘리포니아와 뉴 올리언즈를 연결하는 두번째 횡단철도를 건설했습니다.
철도 4인방은 철도 사업이 캘리포니아에서 독점을 해야만 이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어떤 경쟁사도 자기들 영역에 들어올 수 없도록 철저히 방비를 했습니다. 이들은 또 바다와 강의 수운회사도 매입했습니다. 4인방은 1890년대 철도사업을 독점했습니다. 이들은 문어발식 독점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스탠포드는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많았습니다.
1870년 이후 스탠포드는 철도회사에 매일 매일 나가는 일을 그만두고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 (Palo Alto)에 있는 목장에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는 1885년 정치인 생활로 돌아가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상원의원으로써 스탠포드는 사기업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노력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1887년 인터스테이트 상업법 제정을 적극 반대했습니다. 이 법은 정부가 여러 주에 걸쳐 기업활동을 규제하기 쉽도록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스탠포드는 상원의 여러 소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노동자들에 대한 투표권 등 소수자의 권리 증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1893년 69세로 타계할 때까지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연방상원의원으로 재임했습니다.
리랜드 스탠포드는 철도사업으로 많은 부를 쌓았습니다. 그는 소문난 자선사업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특정 자선사업에는 큰 기부를 했습니다.
릴랜드 스탠포드와 제인 스탠포드 부부는 늦게까지 자녀가 없어 애를 태우다 결혼 18년 만에 아들 리랜드 스탠포드 주니어(Leland Stanford, Jr)를 얻었습니다. 스탠포드가 44세, 제인이 40세 때였습니다. 이들의 아들 사랑은 극진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1885년, 16살짜리 아들이 엄마와 함께 유럽여행을 갔다가 이탈리아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스탠포드 부부는 절망에 싸였고 살 희망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스탠포드는 절망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캘리포니아의 젊은이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을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나이 60세가 된 그는 2천만 달러를 들여 스탠포드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예일, 하바드, 메사추세츠 공대 등 유수한 대학들을 둘러보고 대학 설립에 대한 조언도 들었습니다. 그 후 5년의 준비기간을 거쳐팔로 알토에 리랜드 스탠포드 주니어 대학교(Leland Stanford Junior University), 약칭 스탠포드 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891년에 555명의 첫 학생들을 받아들인 스탠포드는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대학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존 F. 케네디, 버락 오바마, 콘돌리자 라이스, 엘론 머스크, 타이거 우즈 등 수 많은 유명인사들을 배출한 스탠포드 대학교는 미국에서 IT산업의 산실이 된 실리콘밸리를 탄생시킨 주역이 됐습니다.
인물 아메리카 이 시간에는 미국 최고의 대학을 설립한 기업가이자 정치인 리랜드 스탠포드에 대해 알아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