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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


[인물 아메리카] 미국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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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간에는 미국 제 4대 대통령으로,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시간에는 미국 제 4대 대통령으로,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혁명전쟁이 벌어진 후, 제임스 매디슨은 신생국 미국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기 위한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었습니다. 미국의 헌법을 제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오늘날 대부분 민주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3권 분립체제도 그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권리장전이라 불리우는 제 1차 수정 헌법도 만들어 국민의 언론, 표현, 집회, 종교 등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했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은 1808년 대통령에 당선돼, 2차 연임을 했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그의 대통령 직 수행시 보다는 대통령이 되기 전의 행적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일찍부터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많은 일을 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제임스 매디슨은 1751년 3월 15일, 버지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제임스 매디슨 시니어와 엘리노어 로즈 콘웨이 사이에서 난 12자녀 중 장남이었습니다. 그 많은 자녀들 중 성인이 될때까지 생존한 남매들은 6명 뿐이었습니다. 매디슨 집안은 대규모 담배 농장을 갖고 있는 부호였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은 책 읽기를 좋아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때 부터 신체적으로 허약했습니다. 그는 성인이 돼서도 키가 163 cm 밖에 되지 않았고, 목소리도 작았습니다. 또 자주 질병을 앓았습니다. 매디슨은 다른 대부분의 정치인들처럼 뛰어난 외모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향학렬에 불타는 제임스는 오늘날의 프린스턴 대학인 뉴저지 대학으로 가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혁명 전쟁이 시작되자 매디슨은 그의 재능과 지식, 거기에 가정의 경제력이 바탕이 돼 독립의 당위성, 이론적 체계 등을 추진하는 강력한 운동가가 됐습니다.

1776년부터는 버지니아주 입법부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버지니아주 헌법을 창안했습니다. 1787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 헌법협의회의 대표로 참가해 연방헌법 제정에 가장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헌법의 아버지(Father of the Constitution)'였습니다. 매디슨은 정부를 입법, 사법, 행정의 세 분야로 나누는 제도를 추진했습니다. 매디슨은 견제와 균형을 통해 어느 한 부분이 너무 강력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길이 최선이라고 믿었습니다.

매디슨은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 하에서 국무장관을 지내는 등 신생국 미국 정부의 요직을 두로 맡았습니다. 그리고 1809년에 는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은 43세때 돌리 페인라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그가 26세밖에 안되는 젊은 미망인과 결혼한다고 하지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이 데리고 온 아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이들 부부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돌리 매디슨은 열정이 있고, 따뜻했으며, 사교적이었습니다. 돌리 매디슨은 공작새 깃털로 된 터반을 쓰는 등 옷 치장을 대단히 유별나게 하는 여성이었습니다.

남편이 대통령이 된 다음, 매디슨 부인은 거의 매주 관저에서 파티를 열었습니다. 이 파티는 매우 인기가 높았습니다. 경쟁적으로 파티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비집고

들어간다’라는 의미의 squeezes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돌리 매디슨은 정치적으로 반대세력을 포함해 정부 내 모든 분야의 인사들을 파티에 초대했습니다. 돌리 매디슨은 미국 역사상 명성 높고 사랑받는 퍼스트 레이디 중 한명이었습니다.

퍼스트 레이디의 인기가 그토록 높았어도 그것이 남편 매디슨 대통령의 재임시 어려움을 막아주지는 못했습니다.

1차 임기 중 미국은 영국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습니다. 매디슨 대통령은 영국이 국제무역에 간섭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미국인 선원을 억류하고 있는 점 등을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같은 시기, 식민지 개척민들은 영국이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부추겨, 백인 개척민들을 공격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백인들이 미국 정부와 원주민 간의 조약을 위반하고 있었습니다. 1811년, 원주민 전사들이 오늘날의 인디애나 주에 해당하는 곳에서 미국 정부군을 공격했습니다.

이 사건은 티페카노우 전투 (Battle of Tippecanoe)라 불리웠습니다. 이때 미군 지휘관 윌리암 헨리 해리슨 장군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는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해리슨 장군은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그 다음 해 매디슨 대통령은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 전쟁은 미국 역사에서 1812년 전쟁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미군은 패배했습니다. 그러다 1813년 캐나다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에서 미국은 승전을 기록합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토론토의 요크 시를 점령하고 불태웠습니다.

이로 인해 인디언들은 올드 웨스트로 불리우는 지역에서 자신들의 주권을 상실하게 됐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인디언들을 미시시피 서쪽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이주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해리스 장군은 테임스의 전투(Battle of the Thames)에서 또 하나의 승리를 기록합니다. 이 전투에서 인디언 부족 연맹의 지도자 ‘테쿰세’가 부상을 당하고 결국 사망했습니다. 이 두 차례의 전투 패배로 백인 정착민들을 몰아내려는 동부 지역 인디언들의 투쟁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은 1814년 미국 수도 워싱턴 디시를 점령했습니다. 이때 매디슨 대통령은 전투 현장의 지휘관들을 만나기 위해 관저를 떠나 있었습니다. 대통령 관저에는 퍼스트 레이디 돌리 매디슨만 남아 있었습니다.

영국군이 빠르게 접근해 온다는 것을 알게 된 돌리 매디슨은 신속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돌리 여사는 관저의 종들과 당시 15살의 노예 폴 제닝스에게 명령해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벽에서 내리고 대피하도록 했습니다. 그같은 비상 조치로 돌리 여사 자신과 종, 노예, 그리고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는 무사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돌리 매디슨의 신속 현명한 워싱턴 초상화 보존 행동은 두고 두고 이야기 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영국군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데리고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습니다. 이어 영국군은 대통령 관저로 몰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만찬 상이 준비돼 있었습니다. 영국군 지휘관들은 그 상에서 건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관저에 불을 질렀습니다. 워싱턴 디시가 불타고 있는 동안 미국과 영국 관리들은 평화회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또 한차례 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민병대의 장군 앤드루 잭슨이 누추한 옷을 입은 군대라는 의미의 ragtag병력을 이끌고 영국군에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영국군은 2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습니다. 미국 민간인도 13명이 사망했습니다. 영국군은 500여명이 생포됐습니다. 영국군이 철수한 후 워싱턴 디시의 복구작업도 시작됐습니다. 이때 검게 그을린 대통령 관저의 외벽이 흰색 페인트로 칠해졌습니다. 그후 이 관저는 하얀 저택, White House, 즉 백악관이라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1812년 전쟁은 양측 군대에 수만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미국 정부를 파산상태에 빠뜨렸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즉 인디언들에게도 막대한 비극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런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미국에 단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매디슨 대통령 당시 재무장관이던 앨버트 갈라탄은 사람들이 전쟁 전보다 좀더 애국적으로 변했다고 말했습니다.

1812년 전쟁은 미국의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를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1814년 9월, 영국군은 워싱턴에서 멀지 않은 체사피크 만으로 침입해 발티모어의 미군 진지인 맥헨리 요새(Fort McHenry)를 포격했습니다.

포로 석방 교섭을 위해 영국 군함에 갔다 인질로 잡힌 미국 변호사이자 시인인 프랜시스 스콧 키는 밤새도록 계속된 포격에 요새는 무너졌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바다 건너 연기 속에 여전히 펄럭이는 미국기가 보였습니다. 키는 그것을 보고 감격해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오, 그대 보이는가, 이른 새벽 여명 사이로

우리가 자랑스럽게 환호했던,

넓직한 띠와 빛나는 별들이 새겨진 저 깃발이,,,

그가 쓴 즉흥시 ‘별이 빛나는 깃발’은 영국 노래 〈천상의 아나크레온에게〉에 멜로디를 붙여, 미국의 국가가 됐습니다.

매디슨 대통령의 2차 임기가 끝나갈 무렵을 역사가들은 ‘좋은 느낌의 시대’ Era of Good Feeling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매디슨은 취임시보다 더 높은 인기 속에 대통령 직을 물러났습니다. 매디슨은 그후 버지니아의 자택에서20년을 더 살다8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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