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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헐리우드 사상 가장 위대한 연기자, 말론 브란도


[인물 아메리카] 헐리우드 사상 가장 위대한 연기자, 말론 브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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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영화의 중심지 헐리우드가 낳은 최고의 배우. 20세기 대중 문화의 상징, 메소드 연기의 선구자… 미국의 남성 영화배우 말론 브란도를 두고 하는 찬사들입니다. 60년간의 배우 생애를 통해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2회, 골든 글로브상 2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영국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3회 등 화려한 그의 수상 경력이 그같은 찬사가 과장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I once went out with a dame who told me, 'I'm the glamorous type'…she says 'I am the glamorous type.' I says 'so what?'"

BLANCHE: "And what did she say then?"

STANLEY: "She didn't say nothin'. I shut her up like a clam."

세계 영화의 중심지 헐리우드가 낳은 최고의 배우. 20세기 대중 문화의 상징, 메소드 연기의 선구자…미국의 남성 영화배우 말론 브란도를 두고 하는 찬사들입니다. 60년간의 배우 생애를 통해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2회, 골든 글로브상 2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영국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3회 등 화려한 그의 수상 경력이 그같은 찬사가 과장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말론 브란도는 그럼에도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고 개인적인 삶을 지키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너무나 큰 존재여서, 그의 모든 것은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말론 브란도는 1924년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집에서는 버드(Bud)로 불리웠습니다. 어머니 도로시는 그 지역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브란도는 위로 누나가 두명 있었습니다. 브란도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자주 싸웠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이 자신의 배우 생활을 망쳐놓았다고 불평했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아들 말론과도 좋은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말론 브란도는 자서전에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단 한마디도 칭찬을 해준적이 없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말론이 어렸을 때 식구들은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습니다. 말론이 열한살이 됐을 때 부모는 헤어졌다 2년 후 다시 결합했습니다. 말론 브란도는 학교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를 미국 중북부 미네소타 주에 있는 군사학교에 보냈습니다. 말론은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연기를 하는데는 관심이 있었고 드라마 교수가 그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극장에서 연극에 출연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퇴학 당하고 말았습니다.

1943년 19살이 됐을 때 그는 뉴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사회연구를 위한 새 학교’라는 이름의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대학에서 연기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때 교수 중 한분이 스텔라 올더 (Stella Adler) 였습니다. 올더 교수는 사실적인 연기를 위한 ‘메소드 (Method)’ 스타일을 가르쳤습니다. ‘학생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어떻게 드라마 속 인물과 일치시키는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말론 브란도는 메소드 스타일을 빨리 또 쉽게 터득했습니다. 영화 평론가들은 그가 메소드 스타일을 가장 잘 소화하는 연기자로 평하고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여배우는 그가 메소드 스타일에 천성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말론 브란도에게 메소드 스타일을 가르친 건, 호랑이를 정글로 내 보내는 것이었다고 묘사했습니다.

말론 브란도는 여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습니다. 그가 브로드웨이에서 처음으로 주역을 맡은 건 23세때인 1947년이었 습니다. 그는 테네시 윌리암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남자 주인공 스탠리 코왈스키의 역을 맡아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연기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말린 브란도의 명성은 1951년 나온 같은 작품의 영화에서 더욱 높아졌습니다. 브란도의 역은 화가 난 노동자의 역이었습니다. 무대는 루이지애나 주 뉴 올리언즈. 영화 속에서 어느 날 그 화난 남자 스탠리의 처제인 블랑슈가 찾아왔습니다. 블랑슈의 집안은 땅 부자였으나 망해버린 처지였습니다. 정신상태까지 불안정해진 블량슈를 스탠리는 불친절하게 대했고, 모욕하기까지 했습니다. 스탠리가 블랑슈에게 자신은 여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STANLEY: "I don't go in for that stuff."

BLANCHE: "What stuff?"

STANLEY: "Compliments to women about their looks. I never met a dame yet didn't know if she was good-lookin' or not without bein' told. And there's some of them that give themselves credit for more than they've got.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브란도의 두번째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로 브란도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 후의 두 영화에서도 후보에 올랐습니다. 하나는 멕시코 혁명지도자 에밀리아노 자파타의 이야기를 다룬 1952년 영화 “비바 자파타”, 또 하나는 1953년 영화 “줄리우스 시저”에서의 마크 안토니 역이었습니다.

말론 브란도는 1954년 영화 On the Waterfront에서 드디어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어로는 그냥 ‘워터프론트’라는 제목으로 소개됐습니다. 많은 영화평론가들은 말론 브란도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연기를 했다고 평했습니다. 영화 감독 엘리아 카잔은 남자 주인공 역으로는 이 영화에서 브란도의 연기가 영화 사상 최고였다고 평했습니다.

브란도는 불운한 권투선수 테리 말로이 역을 했습니다. 말로이는 자신의 시합 계획을 동생 찰리를 포함한 조직범죄단 우두머리들에게 알렸습니다. 동생은 스포츠 도박에서 이겨 돈을 벌기 위해 말로이에게 일부러 시합에서 지라고 요구했습니다. 말로이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말로이는 이제 일부러 져준 것을 후회합니다. 말론 브란도가 그 장면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나도 수준 있는 도전자가 될수 있었다며 불만스러워 하는 장면입니다.

TERRY MALLOY: "You don't understand. I coulda had class. I coulda been a contender. I coulda been somebody instead of a bum which is what I am. Let's face it."

말론 브란도는 약 40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그가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오른 것은 8차례나 됐습니다. 그는 일본인 통역 역도 했고, 나치 독일의 군 장교 역도 했습니다. 수퍼 맨의 아버지 역도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뮤지컬 "Guys and Dolls"에서 노래도 불렀습니다.

그의 실제 삶도 영화 속 주인공들만큼이나 다양했습니다. 그의 사랑 인생은 특별히 유별났습니다. 그는 여배우 애나 카쉬피와 1957년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혼은 시작부터 삐걱거렸습니다. 크리스천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아들이 결혼 한지 불과 두어달 만에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결혼 다음 해에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1960년, 브란도는 멕시코 계 미국 여배우 모티바 캐스테나다와 결혼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두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1962년 이들은 또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타히티 여배우 타리타와

결혼했습니다. 이들은 “Mutiny On the Bounty" ‘바운티호의 반란’이라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만난 사이였습니다. 이 결혼은 10년간 유지됐습니다. 그러나 10년 후에도 남태평양의 섬 나라 타히티에 대한 브란도의 사랑은 계속됐습니다. 그는 1966년 타히티 근처에 조그마한 섬을 하나 샀습니다. 그후 브란도는 여생을 캘리포니아에 있는 집과 타히티의 섬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영화평론가들은 말론 브란도가 Mutiny on the Bounty이후 연기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 영화의 수도 헐리우드의 제작자들과 감독들은 말론 브란도와 함께 일하기가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어떤 비평가들은 브란도가 연기를 하는데 지친 것 처럼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1972년 영화 The Godfather, 대부에 출연하면서 일제히 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영화사 사람들이 말썽많은 그를 출연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독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그를 기용했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작품성에서도, 흥행에서도,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뉴욕의 이탈리아 계 범죄집단의 우두머리이며 대부인 비토 꼴레오네 역을 한 말론 브란도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극찬을 받았습니다.

VITO CORLEONE: "If you'd come to me in friendship then this scum that ruined your daughter would be suffering this very day. And if by chance an honest man like yourself should make enemies, then they would become my enemies. And then they would fear you."

대부 꼴레오네가 폭행을 당한 딸의 복수를 해달라며 찾아온 사람에게 그들 인간 쓰레기들은 바로 오늘부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말론 브란도는 이 영화로 최우수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수상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브란도는 상을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한 여성을 아카데미 상 시상식장에 보내 대신 말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이 여성은 미국의 영화산업계가 아메리카 원주민, 이른바 인디언들을 다루는 비인간적 태도 때문에 브란도는 수상을 거부한다고 말했습니다.

시상식장에 나온 사람들은 그같은 연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후 미국 영화들은 인디언을 다루는데 좀더 신중해졌습니다.

말론 브란도는 미국의 민권운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인종차별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강력한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시위에도 참가하고 민권 운동 단체에 자금도 제공했습니다.

말론 브란도는 두 차례 가정의 비극을 겪었습니다. 1990년 아들 크리스천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택에서 타히티 남성 한명을 총격 살해했습니다. 대그 드롤렛이라는 피해 남성은 브란도의 딸 샤이앤의 남자 친구였습니다. 크리스천 브란도는 그 사건이 고의가 아닌 실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유죄판결을 받고 5년 동안 감옥에 갇혔습니다.

브란도는 재판에서 자신과 애나 카쉬피가 부모로서의 역할에 실패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또 드롤렛 가족에 사죄하고 차라리 내가 죽은 자와 바뀔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1995년에는 딸 샤이엔이 자살했습니다. 샤이엔은 남자 친구가 살해된 것과 관련해 우울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말론 브란도는 딸의 죽음에 관해, 일체 외부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도들은 브란도가 그 사건에 관해 자신을 질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브란도는 타히티에서 열린 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후 9년 동안 말론 브란도는 겨우 4편의 영화에만 출연했습니다. 배역도 작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미국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말론 브란도가 타계하자 수 많은 유명 배우들이 애도를 표했습니다. 어떤 배우는 한 마디로 “브란도는 그냥 베스트였다” 고 말을 맺었습니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라는 찬사를 받는 그였지만 2004년 그가 80세로 타계했을 때 그를 추모하는 공개적인 장례식은 없었습니다. 그의 누나 조이슬린 브란도 여사는 말론이 그같은 행사를 극도로 싫어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끼리 조용히 장례를 치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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