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부분 대학들은 신입생 선발 기준의 하나로 지원자의 SAT 점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SAT는Scholastic Assessment Test, 수학능력 평가시험의 약자로, 미국 대학위원회, College Board가 주관하는 시험입니다. 미국의 4천여개 대학 외에도 캐나다, 영국, 인도, 일본, 호주, 아랍 에미리트, 말레이지아, 싱가폴 등 여러 대학들도 SAT성적을 지원자 선발 요소 중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뉴욕의 한 지하 단칸방에서 조그마한 학원으로 시작해 오늘날 거대한 SAT시험준비생 훈련 기관을 이루어 놓은 스탠리 H.카플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늘날 카플란 사, 즉 Kaplan Incorporated는 세계 여러 나라에 40개가 넘는 캠퍼스를 갖고 SAT 뿐만 아니라 각종 시험 준비, 언어연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국제 교육 시스템은 놀랍게도 뉴욕시 브루클린의 한 조그마한 지하방에서 어린 소년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스탠리 카플란이라는 소년이 1938년 이웃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스탠리 카플란은 1919년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동유럽인 라트비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유태인 가정이었습니다. 스탠리 카플란은 자신의 성공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교육 중시 사상이 밑바탕이 됐다고 늘 말했습니다. 부모들은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생업은 수도관 수리업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이었지만 어머니 에리카는 자녀들이 모두 대학을 갈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에리카는 지하방을 각종 책과 백과사전, 발명가와 탐험가의 전기 등으로 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7살이 된 스탠리는 동네 친구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조그마한 도서관을 시작했습니다. 가입자에게는 손으로 쓴 회원권을 만들어 주고, 책 반납이 늦은 경우는 벌금을 물리는 제도도 만들었습니다.
9살이 됐을 때는 가르치는 일에 더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스탠리는 다른 아이들이 의사 놀이를 할때 자신은 선생님 놀이를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어떤 친구가 분수나 퍼센트 계산을 잘 모르겠다고 하면, 스탠리는 그 친구와 테이블에 앉아 연필과 종이를 가지고 문제 푸는 방법을 알으켜 주었습니다. 스탠리는 친구들을 가르치는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1930년대 미국에는 대공황이 몰아쳤습니다. 카플란 가정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수도관 사업이 파산해버린 아버지는 불안 장애에 시달렸고 나중에까지도 완전히 정상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스탠리는 집안에 도움을 주기 위해 학교를 2년 동안 쉬었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잡다한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2년을 건너 뛰고 다시 학교에 갔습니다. 그런 공백이 있었음에도 스탠리의 가르치는 천재적인 능력과 그동안의 학원경험은 외부로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 반의 비공식 수학보조교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던중 학교의 인사 담당자가 스탠리에게 새로운 안을 제시했습니다. 성적이 낮은 학생들에게 시간당 25센트씩을 받고 과외수업을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불과 14살이던 스탠리는 뛰듯이 기뻤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탠리는 16살때 뉴욕 시립대학인 City College of New York 에 들어갔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스탠리는 1939년 전 학년 2등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City College 대학원으로 진학해 1941년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 teaching, 즉 가르치는 일이 스탠리가 원하는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이었습니다. 부모님들은 아들이 교사가 되는 걸 원했지만 스탠리는 대공황으로 잃어버린 가정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의사가 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스탠리는 의대에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뉴욕 시내 5군데 의대에 유태계에 할당된 자리가 다 차버려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유태인 가정 자녀들의 의대 진학 열풍이 얼마나 높은지 알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스탠리는 능력이 있는데도 자신이 의대에 진학하지 못한건 인종 문제 때문이었고, 그것이 부당한 문제점이라는 것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카플란은 또 대학 진학이란 부유층 자녀만이 아니라 누구든 갈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대 진학이 좌절되자 스탠리는 어렸을 때 이웃 아이들을 상대로 도서관을 운영했던 지하 방에서 과외 학원을 열었습니다. 19세 때인 1938년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사는 윗층 창문에 “스탠리 H. 카플란 교육센터”(Stanley H Kaplan Educational Center)라는 싸인을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성적향상을 위한 과외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6년 어느날, 엘리자베스라는 학생이 스탠리에게 새로운 대학 수능시험 SAT준비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스탠리는 그 시험의 성격에 대해 혼란스러웠습니다. 시험의 안내문은 학생들에게 공부란 의미가 없는 것 처럼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SAT 는 학생의 지식을 묻는게 아니라 지적능력을 측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탠리는 그렇더라도 어떤 시험에 대해 공부를 안한다는 건 현명하지 않다고 믿었고,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은 훈련에 의해 향상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스탠리는 엘리자베스에게 수학과 독해력을 거듭 거듭 훈련시켰습니다. 그것은 분석력을 향상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감도 높여주었습니다. 공부를 마친 다음 엘리자베스는 쉽게 SAT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스탠리 카플란의 훈련이 대학입시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비좁은 지하 교실은 향학렬에 불타는 학생들로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스탠리가 학원이 잘되는데 기뻐했음은 말할것도 없었지만 그에게는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싼 사립학교에 다니지 않은 학생이라도 유명대학 지원을 할수 있도록 경쟁의 수준을 올려주는데 기여했다는데 있었습니다.
스탠리는 1951년과 1957년에 좀더 넓은 공간과 교육 장비를 갖춘 학원을 새로 열었습니다. 문제 해결 능력도 훈련으로 향상시킬 수 있음을 확인한 스탠리는 당시의 전통적 교육 통념을 뒤엎고, 학생들에게 수능 테스트에서 좋은 점수를 낼수 있도록 하는 학원기업을 설립했습니다. 혁신적인 그의 교육 방식과 교육자료, 학생들에 대한 굳은 믿음은 극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시험준비교육이라는 전혀 새로운 분야의 사업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학원이 나날이 커지자 1960년대에 카플란 사는 17군데에 교육 센터를 마련하고 SAT 뿐만 아니라 GMAC, MCAT, GRE 등여러가지 대학과 대학원 시험준비 반을 개설했습니다. 이들 과목은 경영대, 의대, 법대 등 전문 분야로 진출하기 위한 대학원 과정의 수능시험입니다. SAT가 학사과정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일반적인 시험이라면 이들 시험은 젊은이들이 평생을 몸바칠 특수 분야로 나가기 위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스탠리의 성공에 찬사를 보내는 건 아니었습니다. 대학위원회, College Board와 SAT를 주관하는 교육 테스팅 서비스는 SAT 점수란 가르쳐서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스탠리가 허황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1979년 연방통상위원회(The Federal Trade Commission)는 스탠리 카플란의 교육이 실제로 학생들의 SAT 점수를 높일 수 있다고 판정했습니다. 이후 카플란은 공식 시험 준비 센터를 미국 전역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교육계에서의 인정도도 높아졌습니다. 1983년에는 미국 대학위원회가 카플란을 연례 총회에 연사로 초빙했습니다. 정식 교육기관이 아닌 변두리의 존재라는 인식과 대우를 받아온지 46년여만에 그는 대학위원회의 연사로 초빙이 된 것입니다. 스탠리는 공식 교육 기관에서 인정을 받은 이런 자리에서 연설을 하게 된 것은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스탠리는 카플란 사를 1984년 언론사인 워싱턴 포스트에 매각했습니다. 이로써 카플란 교육센터는 명칭이 카플란 주식회사, Incorporated로 바뀌었습니다. 신문 발행에 촛점을 맞추었던 워싱턴 포스트는 카플란 매입으로, 대형 미디어와 교육 사업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게 됐습니다.
스탠리 카플란이 타계한 2009년 카플란 Inc.의 수강생은 백만명으로 추산됐고, 연 매출은 23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카플란 Inc. 의 수입은 워싱턴 포스트 전체 매출의 58%를 차지했습니다.
매각 후에도 스탠리는 자신의 이름을 사용한 교육기관에 나가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스탠리 카플란은 5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교육사업에 열정을 바치고, 나이 75세때인 1994년 은퇴했습니다.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은 카플란 사를 창립하기 이전부터 소문난 것이었지만, 그가 학원을 떠난 후에도 열정은 계속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부인 리타와 함께 리타 J 와 스탠리 카플란 가정 기금 (Rita J. and Stanley H. Kaplan Family Foundation) 이라는 기구를 창설했습니다. 이 기구는 교육은 물론, 보건, 예술, 유태인 사회, 사회복지 기관 등에 재정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지의 수백만 젊은이들에게 원대한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스탠리 카플란은 2009년 8월 23일, 뉴욕 자택에서 90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