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도 중순을 넘긴 요즈음, 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아직도 감미로운 선률로 남아 있는 경음악 중 하나. Come September 입니다. 빌리 본(Billy Vaughn)과 그 악단이 연주하는 이 곡을 한국에서는 ‘9월이 오면’으로 부릅니다.
본명이 리처드 스미스 본(Richard Smith Vaughn)인 빌리 본은 미국의 음악가로, 여러가지 악기의 연주자이고 악단장이며 가수였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 빌리 본과 그 악단은 수 많은 히트곡으로 미국은 물론 유럽,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 여러 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빌리 본은 그 시대에 다른 어느 악단보다 많은 팝 히트곡을 작곡하고 편곡했습니다. 그는 각종 전통적인 팝, 록, R & B, 컨투리 음악을 쉽게 들으며 즐길 수 있는 곡으로 만들어 내는 마술사같은 존재였습니다.
빌리본은 1919년 켄터키주 글라스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이발사였지만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성향을 이어받은 빌리는 불과 세살때 혼자 만돌린을 익히며 자랐습니다. 빌리는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기타, 알토 색소폰 등 여러가지 악기 연주를 배웠습니다. 이중 알토 색소폰은 그의 주 악기가 됐습니다.
22살때인 1941년 빌리는 방위군에 징병됐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그해 12월 2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그의 복무기간은 길어졌습니다. 미시시피 주의 캠프 쉘비 기지에서 복무한 그는 사단의 악단에서 활동했습니다. 사단장은 빌리 본의 연주와 작곡 능력이 뛰어난 것을 알고 그를 전역때까지 자기 사단에 있도록 했습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전역을 한 빌리는 전문적인 음악가의 길로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웨스턴 켄터키 주립대학에 들어가 작곡을 전공했습니다.
빌리 본은 학비를 벌기 위해 그 지역 나이트 클럽이나 라운지에서 일하고 싶었으나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한테서 배운 이발로 학비를 벌었습니다. 공부를 하는 동안 빌리 본은 다른 3명의 학생들이 구성한 보컬 트리오에
피아노 연주자로 합류했습니다. 그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그들과 함께 노래도 불렀습니다.
1952년 이들 그룹은 공식명칭을 ‘더 힐탑퍼스’ (The Hilltoppers)로 정하고 빌리본이 작곡한 트라잉(Trying)이라는 노래를 녹음했습니다.
이 곡은 빌리본의 첫 힛트곡으로, 그해 인기 차트에 올라가는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빌리본은 2년후 테네시 주 갤러틴에 있는 ‘닷 레코드’ (Dot Records)라는 음반사에 음악 디렉터로 취업을 하게 돼 악단을 떠났습니다.
빌리본은 음악 감독으로 일하는 한편 자신의 악단도 창설하고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빅밴드, 한국에서는 흔히 경음악단으로 불리우던 악단이었습니다. 10명에서 20명 정도의 색소폰, 트럼펫, 기타, 드럼, 바이얼린, 첼로 등 연주자들로 구성된 이 악단에서
본은 악단장으로 주로 리드 기타를 맡았습니다. 그는 1954년 “사랑의 멜로디” (Melody of Love)를 내놓았습니다. 이음반은 100만매가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골드 디스크 상도받았습니다. 골든 디스크는 앨범, 싱글 등의 음반 판매량을 집계해 증명해 주는 인증 시스템입니다.
그로부터 약 10년 동안 빌리 본 악단은 여러 히트곡들을 발표하며 수익면에서도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악단으로 활약했습니다.
빌리본과 그 악단은 40개 이상의 빌보드 차트 진입 곡들을 발표했습니다. 그중 버트 캠퍼트 작곡의A Swingin' Safari는 1962년 빌보드 차트 13위까지 올라가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무렵 빌보드 200에 이름을 올린 빌리본 악단의 연주 음반은 무려 36개에 달했습니다.
빌리본 악단과 같은 시기, 미국에는 또 하나의 유명 빅밴드로 로렌스 웰크 악단이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로렌스 웰크가 주로 텔레비젼 쇼에 집중하는데 비해 빌리본은 음반 취입을 주력으로 삼고 있어, 완벽하고 세련된 연주를 들려주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수 있게 했습니다.
빌리본은 독일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습니다. La Paloma" 와 "Wheels 즉 언덕위의 포장마차 등 여러 싱글 음반이 백만 장 이상씩 팔렸습니다. 1961년에는 싱글 Wheels가 14주 동안이나 1위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외 다른 유럽 국가와, 심지어 인도에서도 그의 음반은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했습니다.
빌리본 악단은 뉴질랜드, 한국, 일본, 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어떤 곡들은 미국에서 발매되기 전인데도 큰 유행을 몰고 왔습니다. 라 팔로마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히트 곡진주 조개잡이 (Pearly Shells)는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가운데 특히 한국, 일본 등 아시아에서 인기였습니다.
진주조개잡이가 히트한 1965년 빌리본 악단은 유럽과 아시아 순회 공연을 나갔습니다.
대부분의 콘서트는 입장권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빌리본 악단은 1967년과 1972년 한국에서도 공연을 가졌습니다.
매회 초만원을 이룬 한국 공연에서는 파도는 저 멀리,언덕 위의 포장마차, 진주 조개잡이 등 「히트」곡들을 연주하면서 몽금포타령, 님은 먼 곳에, 보리밭 등 한국 민요와 대중가요도 연주해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습니다.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빌리 본은 캘리포니아의 팜 스프링스에서 살았습니다.
빌리본은 72세때인 1991년 캘리포니아에서 복막 종양으로 타계했습니다. 그후로도 빌리 본 악단은 아들 리처드 스미스 본 주니어가 이어받아 계속 연주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미국 대중음악계의 산 역사를 쓰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부인 매리온과 함께 캘리포니아 주 에스콘디도의 오크 힐 묘지에 묻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