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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최초로 조선의 사절단을 맞은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


[인물 아메리카] 최초로 조선의 사절단을 맞은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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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간에는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조선 정부의 방미 사절단을 만난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시간에는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조선 정부의 방미 사절단을 만난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883년 9월 18일 뉴욕의 피프스 애비뉴 호텔(Fifth Ave Hotel) 대접견실. 조선의 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엎드려 큰 절을 올립니다. 키가 188cm나 되는 거구의 아서 대통령은 허리를 굽혀 이들에게 답례를 합니다.

아서 대통령은 업무차 워싱턴을 떠나 뉴욕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조선의 대표단을 만난 것입니다.

민영익 전권대신을 비롯한 조선 최초의 사절단은 두 나라 정부와 인민의 우호와 친선을 바란다는 조선의 국서를 대통령에게 증정했습니다. 아서 대통령은 두 나라의 상호우이와 호혜적 교역으로 공동의 이익을 나누고자한다는 답서를 전했습니다.

이렇게 조선 정부 최초의 방미 사절단을 맞은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제 21대 대통령입니다. 부통령으로 재임중이던 체스터 아서는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이 저격 살해 당함으로써 예상치 않게 그의 직을 이어받게 된 대통령이었습니다. 가필드 대통령은 자신을 등용시키지 않은데 대한 불만을 가진 한 남성의 총을 맞고 임기 불과 100일만에 숨을 거두어 미국 역사상 두번째로 짧은 임기를 마친 대통령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그 직을 이어받는 제도가 확실하게 정착돼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체스터 아서는 1881년 9월, 대통령 직을 승계했습니다.

이 당시 미국은 독립전쟁에서 최후의 결전인 요크타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지 100주년을 맞는 시기였고,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나온 때였습니다. 가필드 대통령과 아서 부통령은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았지만 서로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소속 정당이 같은데도 두 사람은 각종 현안에서 서로 의견이 달라 사사건건 서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공연하게 노출시켰습니다. 만약 가필드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체스터 아서는 정부내에서 거의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했을 상황이었습니다.

아서 대통령은 가필드 대통령의 잔여기간인 3년 반 동안 국가 수반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습니다. 역사가들은 아서 대통령이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갖고 있었고, 국정을 잘 이끝어 갔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체스터 A. 아서는 미국 동북부 버몬트 주에서 태어나고 주로 뉴욕 주에서 살았습니다. “A”는 미들 네임 Alan을 의미합니다. 그는 3남 6녀 중 맏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침례교 목사였고, 노예제 반대 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아서는 뉴욕에서 유니온 대학을 마치고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시골 도시에서 조용하게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뉴욕 같은 큰 도시에서 변호사나 관리 등으로 일하며, 돈도 많고 신사다운 인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아서는 법을 열심히 공부한 다음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법률회사에 취직 했습니다. 변호사로 일하는 동안 그는 흑인들의 인권 보호자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대중 교통기관에 흑인들도 차별없이 탑승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지역사회의 유지로 알려지자 그는 공화당에 입당함으로써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서는 남북 전쟁이 벌어지자 군에 들어가 병참장교가 됐습니다. 전쟁이 끝 난후인 1871년 율리시즈 그랜트 대통령은 아서를 뉴욕 관세청장에 임명했습니다. 당시 뉴욕 관세청은 직원이 천 300명이나 되는 뉴욕 최대의 연방 기관이었습니다. 수입품에 부과되는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관세청장은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서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현금이나 선물 등 뇌물을 받거나 제공한 혐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정치적으로 공화당내 계파 지도자인 로스코 콩클린 의원과 밀착돼 있었습니다. 정치적 알력 속에 아서는 루더퍼드 헤이즈 대통령으로부터 관세청장 자리에서 해임됐습니다.

1880년 대선이 시작됐을 때 그 자리를 되찾기 위해 아서와 콩클린은 공화당 후보 지명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율리시즈 그랜트 전 대통령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제임스 가필드 후보가 공화당 후보로 당선됐습니다. 가필드와 아서는 같은 당 소속이면서도 여러 면에서 다른 정치적 소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의 단합을 바라는 공화당 지도자들은 대통령 후보가 된 가필드와 함께 아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습니다.

단합을 위한 당의 노력은 선거에서 승리를 달성하는 좋은 효과를 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은 쉽지 않았습니다. 가필드 당선자가 처음으로 한 일들 중에는 아서 부통령의 과거 직책이었던 뉴욕 세관장을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임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콩클린 상원의원은 새 대통령의 그같은 조치에 항의하며 의원직을 사임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소용돌이 쳤습니다. 1881년 7월 2일, 가필드 대통령은 윌리암스 대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역 대합실에 들어섰습니다. 이때 한 남성이 가필드 대통령을 향해 두발의 총탄을 발사했습니다. 총을 맞은 가필드 대통령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저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향년 50세였습니다. 취임한 지 만 넉 달도 되기 전이었습니다. 범인 찰스 기토는 대통령이 자신에게 외국 공사 자리를 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살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체스터 아서는 이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대통령 직을 승계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체스터 아서에 대해 이권을 추구하고 사리사욕에 물든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때묻은 정치 꾼으로 당내 파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물로 보았습니다. 더구나 공공정책을 이끌어 갈 경험이 없어 대통령직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그는 그와같은 낮은 신뢰도를 개선하고 예상을 뒤엎는 신선한 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인의 주목을 받은 첫번째 조치는 1882년, 천 800만 달러에 달하는 강과 항구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정치적 후원 세력에게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는 대형 사업들이 있었습니다. 정치적 계파를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콩클린 세력과도 거리를 유지하며 당내 파벌 인사들을 요직에 임명하지 않는 등 새로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지지세력으로부터 배신자라는 욕을 먹으면서도 그는 편파적 인사관행의 고리를 끊었습니다.

대부분 당내 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펜들턴법(Pendleton Civil Service Act)이라 불리우는 과감한 민권법을 제정했습니다. 여기에는 정부 내의 부패 근절, 매관매직 금지, 엽관제 퇴치 등 조치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정부 요직은 정치적 거래 대신 시험을 치러 등용하는 제도를 수립했습니다. 당의 요인들이 그의 펜들턴 법을 비난하자 아서 대통령은 “ 체스터 아서와 미 합중국의 대통령은 완전히 다르다”고 선언했습니다.

아서 대통령은 관세를 줄이는 문제에서도 공화당 지도부와 다른 노선을 택했습니다. 그는 또 일부 지역이나 기업에만 지원을 하는 연방자금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신 그는 정부의 잉여자금으로 더 많은 국민들이 혜택을 볼수 있도록 세금을 삭감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조치는 의회에서 올라온 이민제한법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문제의 이민법은 중국인들에게 20년 동안 미국 이민을 금지토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서 대통령은 중국인들이 미국의 철도 건설에 큰 기여를 함으로써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며, 그런 중국인들을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서 대통령은 또 중국과의 무역 확대 가능성을 해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의회가 20년이 아니라 10년으로 제한을 하자는 법안을 다시 들고 나오자 그것은 받아들였습니다. 의회는 중국인의 이민을 10년간 중단시켰고 얼마 후에는 영구히 금지시켰습니다. 아서 행정부는 1882년에 가난하고, 범죄기록이 있고, 정신질환이 있는 자들에게는 이민을 허용하지 않는 연방 최초의 이민법을 제정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그가 대통령으로써 한 일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쩌면 백악관의 재 단장일 것입니다. 칙칙한 백악관의 내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그는 뉴욕의 정상급 실내장식 회사인 티파니 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백악관을 더욱 밝고 우아하게 만들도록 했습니다. 새롭게 단장한 백악관 홀에서 아서 대통령은 자주 사람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키도 크고 체구도 건장한데다 멋들어진 구렛나루에 화려한 옷을 입기 좋아한 그를 사람들은 Gentleman’s Boss, 신사들의 보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서는 대통령 직을 이어받은 지 얼마 안돼 치료가 불가능한 신장 질환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1884년 대선 후보를 정하기 위한 공화당 전당대회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자는 지지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당의 지명자는 제임스 블레인으로 결정됐습니다. 그는 첫 임기가 끝 난 후 경쟁당인 민주당의 그로브 클리브랜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뉴욕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부인 엘렌은 남편이 대통령이 되기 전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혼자가 된 아서 대통령은 뉴욕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그러기에는 병세가 심각했습니다. 그 대신 낚시나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자유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그런 생활도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는 1886년 11월 18일, 비교적 젊은 나이인 57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인은 신장병과 뇌출혈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옵서버들은 아서 대통령이 유능한 지도자였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남북 전쟁 때는 싸움터에 나갔고, 정치인으로서는 전후 나라를 재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사람들이 예상치 않았던 개혁정치를 구현한 아서 대통령은 뉴욕 올버니에 있는 루럴 공동 묘지, 부인 옆에 나란히 안장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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