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헐리우드의 대스타 엘리자베스 테일러. 아름다운 외모, 자주빛 눈동자, 윤기나는 검은 머리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8번의 결혼, 다양한 사생활로도 많은 화제를 나은 여성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1980년대 후천성 면역 결핍증 에이즈(AIDS) 연구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모은 자선사업가이자 사회사업가이기도 했습니다.
Act: CLEOPATRA: “Without you, Antony, this is not a world I want to live in, much less conquer. Because for me, there would be no love anywhere. Do you want me to die with you? I will. Or do you want me to live with you? Whatever you choose.”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사랑하는 로마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없는 세상은 살고 싶은 세상도 아니고, 정복도 의미가 없다, 그대를 따라 죽을까, 그대와 함께 살까, 원하는대로 할께요.” 라며 절절한 사랑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1963년에 나온 이 영화에서 이집트 여왕으로 나온 엘리자베스는 백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화폐 가치로는 약 천만 달러에 해당합니다. 당시로서는 영화 한편에서 배우가 받은 최고액의 출연료였습니다. 영화 클레오파트라는 영화 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로스먼드 테일러는 1932년 영국 런던에서 살던 미국인 부모한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프란시스는 미술품 거래상이었고 어머니 새라는 결혼 전까지 연극 배우였습니다. 테일러 가족은 그가 7살때인 1939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사했습니다. 영화 산업으로 유명한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그녀의 미모는 소문이 났고 영화사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열살때,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 There’s One Born Every Minute” 즉 1분 마다 한명씩 태어난다” 라는 영화였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반려견과의 이야기, “Lassie Come Home.” 즉 “래시, 집에오다” 에 출연했습니다. 그녀를 스타로 만든 영화는 1944년의 “National Velvet”이었습니다.
스무살이 된 엘리자베스는 이 영화에서 벨벳 브라운이라는 영국 소녀의 역을 맡았습니다. 위기에 빠진 말을 구하고, 그 말을 훈련시켜, 유명한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940년대 엘리지베스 테일러는 주로 가정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많이 출연했습니다. 그런 영화에서 아역으로 출연한 배우들이 반드시 십대나 어른 세대의 영화에서도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수월하게 십대, 성인 세대의 영화로 옮겨갔습니다. 1950년, 엘리지베스는 인기영화 “Father of the Bride.” “아빠의 신부”에 출연했습니다.
그해는 엘리자베스가 호텔 기업 총수 콘라드 니키 힐튼과 처음 결혼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혼은 1년만에 끝나고 맙니다. 첫번 째 이혼을 한 다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문제가 14살때부터 섹시한 여성으로 인식돼 온 것 때문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신체는 성인 여성인데 아직 어린이의 감성을 갖고 있는데서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영화배우로 유명한 만큼이나 그의 사생활에서도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각종 미디어들은 경쟁적으로 그녀의 결혼과 이혼, 사랑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1952년 영국배우 마이클 와일딩과 결혼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5년 후 이혼한 엘리자베스는 영화제작자 마이클 토드와 결혼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마이클 토드가 1958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토드의 친구들 중에는 가수 에디 피셔가 있었습니다. 에디 피셔의 아내 데비 레이놀즈는 엘리자베스의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에디 피셔는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하기 위해 아내를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그런 행동에 충격을 받았고 분개했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배우 생애 초기 여배우로써 최고의 노력은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1951년 영화 “태양의 계절”(A Place in the Sun)에서 그런 태도가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두명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 한 젊은이의 비극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 영화에서 함께 출연한 남자 배우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였습니다.
GEORGE: “I am the happiest person in the world.”
ANGELA: “The second happiest.”
GEORGE: “Oh, Angela, if I could only tell you how much I love you, if I could only tell you all.”
ANGELA: “Tell Mama, tell Mama all.”
클리프트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이 영화를 깊이 있는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영화에서 청순한 모습과 관능적인 모습을 너무나 잘 표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엘리자베스는 연기력이 뛰어나다는 찬사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더욱 중후한 역, 흥미로은 역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됐습니다.
그 중 하나가 록 헛슨(Rock Hudson), 제임스 딘, (James Dean)과 함께 출연한 영화 “Giant”였습니다.
텍사스의 대규모 목장주와 그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JETT: “I guess you’re about the best looking gal we’ve seen around here in a long time, I think. Prettiest I think I’ve seen down here.”
LESLIE: “Why thank you, Jett. That’s a very nice compliment. And I’m going to tell my husband I’ve met with your approval.”
영화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제임스 딘은 이 영화의 완성판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영화가 개봉되기 1년 전 1955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50년대 말에 출연한 여러 편의 영화에서 아카데미 취우수 여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중 첫번째 작품이 1957년에 개봉된 “Raintree County”였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다음 해 테네시 윌리암스의 희곡 “양철지붕위의 고양이” (Cat on a Hot Tin Roof)를 각색한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알콜중독 남편을 가진 미모의 부인역을 했습니다. 남편역은 폴뉴먼이었습니다.
많은 영화평론가들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이 영화에서 최우수 연기를 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MAGGIE: “Oh Brick! How long does this have to go on, this punishment? Haven’t I served my term? Can’t I apply for a pardon?”
BRICK: “Lately, that finishing school voice of yours sounds like you was running upstairs to tell someone the house is on fire.”
MAGGIE: “Is it any wonder? You know what I feel like? I feel all the time like a cat on a hot tin roof.”
BRICK: “Then jump off the roof, Maggie, jump off it. Now cats jump off roofs and they land uninjured. Do it. Jump.”
MAGGIE: “Jump where! Into what?”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세번째 아카데미 후보 영화는 이번에도 테네시 윌리암스의 희곡 ‘지난 여름 갑자기” (Suddenly Last Summer)였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1960년 드디어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 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출연 영화는 (Butterfield 8)였습니다. 그로부터 6년 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로 두번째 여우 주연상을 차지했습니다. 상대역은 리처드 버튼이었습니다.
MARTHA: “In fact, he was sort of a flop. A great big, fat flop.”
GEORGE: “Stop it, Martha.”
MARTHA: “I hope that was an empty bottle, George. You can’t afford to waste good liquor. Not on your salary. Not on an associate professor’s salary.”
이 영화는 에드워드 앨비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나이가 있는 대학교수의 부인 역을 잘 하기 위해 일부러 몸무게를 늘리기까지 했습니다.
영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는 많은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리처드 버튼과 처음 함께 연기를 하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리처드 버튼과 함께 출연한 클레오파트라는 영화 팬들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영화 제작 시 두 사람은 각기 결혼한 유부남 유부녀였습니다. 그러나 영화 촬영이 계속되는 동안 두 사람 관계는
밀착됐고, 이들의 염문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출연 작품들의 흥행성공으로 이들의 부와 명성도 높아졌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나중에 리처드 버튼이 사망할 때까지 그와 미친듯 사랑에 빠졌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리처드 버튼은 1989년 예상치 않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만약 리처드 버튼이 죽지 않았다면 그와 세번째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후 버지니아 출신 연방상원의원 존 와너(John Warner), 그 다음으로는 건축가 래리 포텐스키(Larry Fortensky)와 결혼했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전 생애에 걸쳐 여러가지 건강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두차례의 폐렴에서는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녀는 척추, 엉덩이, 심장에도 문제가 있었고 체중도 위협적이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술과 마약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이를 치료하기 위해 메디컬 센터에 들어갔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이런 모든 것들을 숨기지 않고 다 공개했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많은 시간을 사업과 자선활동에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여러 유명 향수 광고에 등장시키며 거액의 수입을 올렸습니다. 1985년 엘리자베스는 미국 에이즈 연구기금, 약칭 amfAR (앰파)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대부분 사람들이 에이즈는 문란한 성행위의 결과라며 좋지 않은 시각으로 보고 있을 때인데도 그녀는 과감히 이를 막기위한 활동을 벌인 것입니다.
에이즈 연구와 환자 치료를 위해 그녀가 조성한 기금은 1억 달러가 넘었던 것으로 언론들은 전했습니다. 또 1991년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이즈 기금을 출범했습니다. 이 기금은 이미 에이즈에 걸려 있는 세계 여러 지역의 환자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엘리자베스 테일러는 201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향년 79세였습니다. 에이즈 예방과 지원업무를 함께 했던 동료들은 그녀가 아름다운 외모, 성공한 연예인 등으로 화제를 모은 인물이지만, 대단히 명석하고 용기 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깊은 여성이기도 했다며 그를 추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