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 22일. 달라스를 떠나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대통령 전용기 안. 린든 B 존슨, 당시 부통령이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합니다.
Act: Swearing
이날 미국 제 35 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암살됐다는 소식에 미국인들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가운데 즉각적인 승계로 연방정부의 기능은 중단없이 이어졌습니다. 린든 존슨 새 대통령은 부인 레이디 버드 여사,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 여사, 그리고 새라 휴즈 판사, 이렇게 세 여인에 둘러싸여 제 36 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 제 36대 린든 B. 존슨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린든 베인스 존슨은 1908년 8월 27일 미국 남부 텍사스 주에 있는 조그마한 농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여러 대째 그곳에서 산 토박이였습니다. 부근에 있는 존슨 시티라는 도시 이름도 그 집안의 이름을 딴 것이었습니다. 린든은 다섯 남매의 첫째였습니다. 아버지는 농장주이면서 그 지역의 정치 지도자로 오랫동안 민주당 소속 텍사스 주 의원을 지냈습니다. 어머니는 교사겸 작가였습니다.
한때는 집안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로 인해 린든의 남매들은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큰 아들인 린든은 교원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린든 존슨은 학생지도에 뛰어난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린든은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그들로부터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과거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에는 남미계 주민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린든은 교사를 하면서 그들이 생각보다 더 가난하고 어렵게 산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백인들로부터 많은 차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린든은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린든은 교사로서 보다는 정치인으로써 이들을 돕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지역 정치인들의 선거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또 그들의 보좌관이 됐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에는 자신이 연방 하원의원이 됐습니다.
린든은 클라우디아 테일러(Claudia Taylor)라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를 ‘레이디 버드’ (Lady Bird)라 불렀습니다. 클라우디아가 아기였을 때 그녀의 유모가 예쁘다는 표현으로 ‘레이디 버드’라고 부른 것이 이름으로 굳혀진 것이었습니다. 린든 존슨과 레이디 버드는 평생을 같이 살았고, 두 딸을 두었습니다.
린든 존슨은 12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하원의원으로 봉직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에는 텍사스를 지역구로하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이때부터 린든 존슨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상원에서 갈수록 주요 직책을 맡게 됐습니다. 1954년에는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됐습니다. 상원의 원내총무는 다른 당 소속 의원들과도 잘 어울려 업무를 수행하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역사가들은 존슨이 열심히 일하는 의원이었고, 언제나 준비가 돼 있었다고 평했습니다.
미국의 한 저명한 전기 작가는 존슨이 ‘상원의 매스터’였다고 평했습니다. 이 저서는 존슨이 극히 야심찬 인물이며 때로는 잔인하기 까지 하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찬양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웰빙을 염려하는 일면도 있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존슨은 매우 다양한 면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1960년 그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갔지만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패했습니다. 그러나 당은 그에게 부통령 후보로 나서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존슨은 그같은 요청을 수락했지만 그로부터 약 3년여만에 자신이 백악관으로 들어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상상도 못했던 사건으로 졸지에 백악관에 들어가게 된 존슨 대통령의 자리는 어려웠습니다.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은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민권투쟁으로 미국 사회는 어수선했습니다.
일단 취임 선서를 하고 나자 존슨 대통령은 상원에서의 경험을 살려 여러가지 개혁법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법은 거의 모두 빈곤과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었습니다. 새로운 법에 의해 국민보건과 의료제도를 위한 프로그램이 출범했습니다. 연방 자금으로 빈곤층을 위한 식품지원을 하도록 하고 취업 희망자를 위한 훈련 계획도 마련했습니다. 1964년에는 민권법 즉 Civil Rights Act에 서명했습니다.
이 법은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추진했던 것으로 인종, 종교, 민족, 성별을 근거로 차별하는 해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 사업체, 도서관, 수영장 등 공공 시설에서는 인종차별 정책이 당연한 것으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고용주들이 그런데 근거해 직원을 차별하는 것도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정책들은 그가 추구하는 Great Society, 즉 위대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964년 존슨은 투표자 수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지지를 휩쓸며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그같은 정책을 발표하면서 미국은 부유하고 힘 있는 사회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빈곤을 없애고, 인종적 불평등을 없애는데도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녹취 존슨 연설 We believe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존슨 대통령은 우리는 모두 동등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그러한 부당함은 사라져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존슨은 뒤를 이어 범죄예방, 오염감소, 예슬 지원, 도로 안전화, 소비자 보호 등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존슨 정부는 이민정책을 새로 만들고 가족 초청, 특수 기능자, 난민 등에 대한 이민 문호를 대폭 개방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또 1965년에 투표권법에 서명했습니다. 이로써 오랜 세월 흑인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투표권이 부여됐습니다. 그후 주택 구매나 임대에 있는 차별조항을 없애도록 했습니다.
그런 반면 존슨 대통령은 미국 역사의 큰 시련의 하나였던 베트남 전쟁에 부딛쳐야 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앞서 베트남 미군 파병 명령서에 서명을 한바 있습니다. 1950년 이후 미국의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등 역대 대통령들은 베트남 전 개입을 점차 늘려왔습니다. 동남아시아가 공산화되는걸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베트남 정책을 이어간 존슨 대통령은 북 베트남 공산정권으로부터 미군을 보호하고 더 이상의 침략을 막기위한 어떤 조치도 가능하도록 의회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후보 때인 1964년 베트남에 더 이상의 미군 전투병력을 파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후 4년에 걸쳐 존슨 대통령은 수십만에 달하는 육군과 공군을 베트남에 파병했습니다. 공산 베트남은 전투와 외교로 끊임없이 반격을 가해왔습니다.
1966년 초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국내 여론은 갈수록 나빠졌고, 존슨 대통령의 국내 인기도 크게 추락했습니다. 그가 소속한 민주당은 총선에서 의석수를 많이 잃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의회가 자신의 계획을 지지해 주도록 설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베트남 전쟁과 국내 사업의 과다 지출로 국내 경제마져 약화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징병을 피해 외국으로 빠져 나갔습니다. 반전 시위는 전국 도처에서 벌어졌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25개 우방국에도 베트남 전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한국은 이에 호응해 9년간 연인원 34만여명의 병력을 베트남 전에 투입했습니다. 미군을 제외한 최대규모의 외국 병력이었습니다.
1968년 초 차기 대선 후보자 선정 과정에 존슨 대통령은 재선출마를 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후보에 나서지도 않고, 당 후보로 지명돼도 수락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로부 얼마 안돼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됐습니다. 이에 분노한 미국인들은 미국내 100여개 도시에서 격렬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해 6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됐습니다. 당시 로버트 케네디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중이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의 죽음과 존슨의 재출마 포기는 민주당을 더욱 분열시켰습니다.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는 수 많은 집단들이 몰려들어 당의 후보경선에 항의시위를 벌였습니다. 당 대회는 난폭한 시위대와 경찰간의 충돌로 막을 내려야 했습니다.
대통령 직을 물러난 린든 존슨은 텍사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백악관 회고록을 쓰고 존슨 대통령 도서관 설립을 준비했습니다. 그의 기념 도서관 Lyndon B. Johnson Library and Museum은 텍사스 주립대학 시스템인 University of Texas, Austin에 세워졌습니다.
백악관을 나온 존슨 대통령은 그후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담배를 많이 피웠습니다. 그는 사망 직전 방송인 월터 크롱카이트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불안할 때 차라리 담배를 피우는 것이 가슴이 편하다’고 말했습니다. 1973년 1월 22일 그는 자신의 텍사스 농장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습니다.
향년 64세. 그는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몇 발자욱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족 묘지에 묻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