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테네시 주 내쉬빌에는 전국적으로 명성 높은 밴더빌트 대학교가 있습니다. 학생 수 약 만 2천명에 달하는 이 대학은 미국의 대학평가에서 15위를 오르내리는 상위권 종합대학입니다. 전국에 3천여개나 되는 대학이 있는 미국에서 15위라면 정상급 학교입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앨 고어 전 부통령도 바로 이곳 Law School 출신입니다. 이 학교는 1800년대 후반 미국의 해운업과 철도업의 거부 코닐리어스 밴더빌트가 설립한 학교입니다. 이 시간에는 자수성가로 밴더빌트 재벌가의 창업자가 되고 명문 밴더빌트 대학을 설립한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코닐리우스 밴더빌트는 주로 해운업과 철도사업으로 돈을 벌어19세기 미국 최고 부자 반열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며 사업수완을 익혔습니다.
아버지는 뉴욕 시의 스태튼 섬과 육지인 맨하탄을 왕래하는 화물선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밴더빌트 집안은 고조할아버지 때 네델란드에서 이민 온 분들이었습니다. 단 한척의 배를 갖고 뉴욕 만에서 약 8 Km남짓한 거리에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던 밴더빌트는 1820년대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끝내는 미국 최대의 증기선 회사를 이룬 억척스런 인물이었습니다. 코모도어, 즉 해군 준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운 밴더빌트는 그토록 크게 성장하기까지 지독하다 할 정도로 경쟁을 벌였고, 무자비한 사업가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는 선박 뿐만 아니라 1860년대에 철도사업에도 뛰어들어 또 하나의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는 철도 운송을 다른 어떤 수단보다 효율적인 운송 방식으로 만들어 놓는데 기여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미국 철도 역사를 말하는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코닐리어스 밴더빌트는 1794년 5월 27일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코닐리어스 밴 데르빌트와 어머니 피비 핸드 사이에서 난 9형제중
네째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처음 농사를 지었으나 아버지는 화물선 운항을 하면서 차츰 재산을 모았습니다.
어린 밴더빌트는 학교를 11살에 그만두고 아버지를 도와 화물선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16살이 되자 그는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페리선 사업을 하고 싶었던 그는 어머니한테서 100 달러를 빌려 페리오거 선박, 즉 돛이 두개가 있는 배를 마련했습니다.
밴더빌트는 자서전에서 그 배는 아버지 소유였으며, 이익금의 절반은 아버지가 가져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밴더빌트는 차츰 여러 척의 소형 선박을 소유하며 회사를 키우고 선박의 디자인도 배웠습니다.
1813년 밴더빌트는 사촌간인 소피아 존슨과 결혼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13명이나 되는 자녀를 양육해야 했습니다. 사별한 전 부인과 이혼한 전 부인 사이에서 난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817년 그는 화물선 운송 외에 외사촌으로터 포장마차를 구입해 음식과 잡화를 팔기도 했습니다. 그해 말에는 뉴욕과 뉴저지 사이를 운항하는 증기선 회사 사장 토마스 기븐스 밑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기븐스는 밴더빌트에게 화물선 한척의 선장 일을
맡겼습니다. 밴더빌트는 자신의 해운업을 하면서 동시에 기븐스 업체 경영에도 참여했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밴더빌트는 큰 사업체를 운영하는 여러가지 복잡한 것들을 많이 배우게 됐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확대돼 가는 증기선 사업에 기회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밴더빌트는 기븐스 해운 항로의 중간 지점인 뉴저지주 뉴 브런스위크로 집을 옮겼습니다. 사람과 화물의 이동이 많은 이곳에서 부인 소피아는 숙박업소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소피아는 먹이기, 입히기, 교육하기 등 많은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익힌 솜씨로 고객들로부터 인기를 끌었습니다. 1820년대 말, 그는 자신의 증기선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는 증기선을 직접 제작하는 한편, 선박 운항을 뉴욕 일대의 여러 노선으로 확장했습니다. 집요하고 공격적인 밴더빌트는 경쟁사들과 첨예한 요금 경쟁을 벌이면서 이 일대의 해상 운송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밴더빌트는 1834년 뉴욕과 알바니 간 증기선 사업을 ‘허드슨 리버’라는 기업이 독점하는데 이의를 제기해 당시의 민주당 대통령 앤드루 잭슨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해 말 허드슨 리버 사는 밴더빌트에게 거액을 건네며, 더 이상 자신과 경쟁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 부탁이 있은 후 밴더빌트는
자신의 해운 노선을 롱아일랜드 사운드라는 다른 곳에 집중했습니다.
그가 미국 해군의 최고 계급인 코모도어 즉 준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기 시작한 것은 1830년대였습니다. 중요한 증기선 기업가들에 붙여지는 일종의 명예이지만 밴더빌트는 처음으로 이 명칭으로 불리웠고, 1840년대말까지 오직 그 만이 그 호칭으로 불리웠습니다.
1830년대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미국판 산업혁명이 일면서 많은 섬유공장이 들어섰습니다. 초기의 미국 철도는 바로 이 지역인 보스톤과 롱 아일랜드 사운드에 건설됐습니다. 열차는 뉴욕으로 가는 증기선 노선과 연결됐습니다. 1830년대 말이 되자 밴더빌트는 사운드 지역의 증기선 사업도 완전 장악하게 됐습니다.
밴더빌트는 이제 철도 사업으로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1840년대 그는 가장 매력적인 노선, 즉 뉴욕, 프로비던스, 보스톤 연결 철도 사업을 흡수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른 경쟁사에 비해 운임을 크게 낮추었습니다. 또 경쟁사의 주식을 매입해 실세가 되고 그 회사의 사주가 됐습니다. 이로써 그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철도망을 가진 사업가로 올라섰습니다.
이 시기에 밴더빌트는 여러가지 다른 사업도 벌였습니다. 그는 맨하탄과 스태튼 아일랜드에 대규모의 땅을 매입했습니다. 1838년에는 스태튼 아일랜드 페리 사를 인수했습니다.
1850년대 초,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는 금을 캐러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른바 골드 러쉬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대륙의 동서를 횡단하는 열차가 개통되기 전이었습니다. 서부로 가는 사람들은 파나마를 거쳐 캘리포니아 서해안으로 가거나 아프리카 최남단인 케이프 혼을 돌아 가야 했기 때문에 3개월이 넘게 걸리는 긴 여로였습니다. 비용도 많이 들었습니다.
밴더빌트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다 빨리 수송하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당시 사용되던 화물 수송 중심의 클리퍼 선박을 보다 안전한 여행객 용으로 바꾸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르고 안전하며 비용이 적게 드는 노선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달 연구 끝에 그는 동부의 나이아가라 호에서 샌 후안 강을 따라 대륙의 중부를 남서쪽으로 통과해 태평양에 이르는 물길을 개발해 냈습니다. 항로는 총 600 마일, 여행 기간은 불 35일밖에 안됐습니다. 밴더빌트의 새로운 운송 사업은 즉각 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비용은 기존의 비용보다 싼 600달러로 했다가
얼마 안가 400 달러로 낮추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150 달러까지 낮추었습니다. 그 사업은 당시 돈으로 1년에 백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배더빌트에 안겨주었습니다. 현대의 가치로는 3천만 달러가 넘는 규모였습니다.
1861년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밴더빌트는 북군인 유니온 해군에 가장 크고 가장 빠른 증기선 한척을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밴더빌트 호로 명명된 이 선박은 약 100만 달러를 들여 건조한 것이었습니다. 이 함정은 침공해 오는 남군을 물리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됐습니다.
밴더빌트의 뒤를 이어 등장한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석유재벌 록펠러 등 이른바 도금시대 미국의 재벌들과 달리 그는 거대한 저택을 갖고 있지 않았고, 자선사업에 자신의 부를 대규모로 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의 마감이 다가오는 1873년에는 유일하게 백만 달러를 교육사업에 제공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쉬빌의 밴더빌트 대학 설립을 위한 기금이 됐습니다.
밴더빌트는 유명한 거대 저택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후손 들은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와 노스 캐롤라이나 애쉬빌에 소문난 저택들을 건립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걸설된 애쉬빌의
빌트모어에 있는 저택은 밴더빌트의 손자가 지은 집으로, 방이 250개나 되는 호화로운 시설입니다. 이 저택은 길드 시대의 대표적인 고급 건물로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큰 개인 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밴더빌트는 사망하면서 당시 가치로 1억 달러 이상에 달하는 유산을 아들 윌리암에게 넘겨주었습니다. 1870년대 1 달러가 오늘날에는 20-30 달러 가치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밴더빌트는 1877년 1월 4일, 82세로 타계했습니다. 그가 묻힌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의 가족 묘소에는 그의 박물관도 세워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