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는 미국의 기초를 놓은 건국 선조들 중 정교, 분리 주의의 기틀을 마련해 놓은 로저 윌리엄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미국은 제1 수정 헌법 제1조에서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 단체가 정부 역할을 해서는 안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종교간 분리 원칙의 기틀은 놓은 로저 윌리엄스는 영국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은 신대륙 초기의 이주민이었습니다. 그가 미국에 온 목적은 신대륙의 원주민, 일명 인디언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동북부 영국 식민지인 매사츄세츠 베이에 도착한 윌리엄스는 정착민들이 종교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다 원주민의 땅을 탈취하행위를 보고, 실랄한 비판을 가해 교회 지도자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결국 그는 매사츄세츠 식민지에서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는 나라간셋 인디언의 땅을 매입하고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해, 여러 신앙 공동체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했습니다. 종교의 자유와 국가와 종교의 분리에 대한 로저 윌리엄스의 신념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1세기나 지난 뒤 미국 권리장전의 기본 정신이 됐습니다.
로저 윌리엄스는 1603년 경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런던에서는 1666년에 대화재가 나는 바람에 많은 기록물들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윌리엄스는 1603년 1월이나 2월 중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만 될뿐 그의 정확한 출생일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윌리엄스는 런던의 큰 상인이었습니다. 어머니 앨리스는 로저를 당시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가르침 속에서 양육했습니다. 로저는 어렸을 적부터 당시의 영국왕 제임스 1세가 Puritan, 즉 청교도들을 박해하는 걸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종교의 자유와 시민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굳히게 된 것으로 역사가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청년기가 됐을 때 윌리엄스는 머리가 비상한 인사로 소문난 변호사 에드워드 코크 경의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코크 경의 지원으로 그는 런던에 있는 차터 하우스 학교에 들어가 공부했습니다. 언어를 익히는데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윌리엄스는 그곳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루어, 네델란드어, 프랑스어 등을 빠른 시간내에 배웠습니다. 윌리엄스는 그런 능력으로 케임브릿지에 있는 대학, 펨브로크 칼레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627년 학교를 졸업한 윌리엄스는 성공회 수도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를 떠나기 앞서 그는 청교도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것은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윌리엄스는 1629년 매리 버나드( Mary Bernard)라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여섯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케임브릿지를 떠난 윌리엄스는 영국 정계 거물 윌리암 마샴 경의 영적 지도자가 됐습니다. 그 인연으로 윌리엄스는 청교도의 강력한 정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과도 인연을 갖게 됐습니다.
성공회가 부패하고 분리주의 자들로 변질됐다고 비판한 윌리엄스는 진짜로 예수가 재림해 교회를 세우기 전에는 어떤 것이 진정한 종교인지 단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1년 후 그는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즉 인디언에게 선교를 계획한 윌리엄스는 매사츄세츠 식민지 도시 보스톤에 도착했습니다. 윌리엄스는 그들의 언어, 관습, 종교를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이해했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서 윌리엄스는 식민지 땅을 마음대로 떼어 하사하는 영국 왕의 특권에 대놓고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는 땅은 오직 이곳에서 선조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들로부터 직접 구입하는 것만이 정당한 소유권 이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윌리엄스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원만하고 우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의를 보면 때로는 격정적이고 흥분을 잘하는 면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 동안 윌리엄스는 식민지인 매사추세츠 베이 관리들과 개인의 신앙 문제로 심한 갈등을 빚었습니다.
정작 종교박해를 피해 신대륙에 건너왔다고 자처하는 청교도들이었지만 그들은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 기득권을 형성하자 다른 종파를 배척했습니다. 윌리엄스는 정부가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권한을 가져서는 안된다, 즉 정부와 교회는 엄격히 분리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윌리엄스는 나아가 모든 사람은 그들 자신의 의식에 따라서 믿고 싶은 종교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 청교도, Puritan 은, 종교와 시민법은 하나이며, 이를 준수하는 것이 모두의 의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시각의 식민지 정부에 윌리엄스의 주장은 심각한 우려 대상이었습니다. 식민지 정부는 그를 재판에 넘겼습니다.
1635년 식민지 치안판사는 선동과 이단 혐의로 윌리엄스를 식민지에서 추방했습니다. 윌리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나라간세트 만 지역으로 대피했습니다. 윌리엄스는 이곳에 프로비던스 (Providence)로 이름지은 집단거주지를 설립했습니다. ‘신의 섭리’가 인도했다는 의미의 프로비던스는 이후 종교의 자유가 보장 되는 곳, 신앙 문제로 박해받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됐습니다. 그중에는 청교도의 개혁주의 지도자인 앤 허친스도 있었습니다.
윌리엄스를 이미 추방했는데도,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청교도는 그의 존재가 부담스러웠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프로비던스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영국왕이 신대륙의 땅을 마음대로 떼어줄 권한이 없다고 주장한 윌리엄스였지만, 그는 두 차례나 영국으로 가 자신이 설립한 프로비던스를 포함한 로드 아일랜드 지역을 매사추세츠 식민지와 동등한 자격의 새로운 식민지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었습니다.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침공을 막기위한 전략이었습니다.
프로비던스로 돌아온 윌리엄스는 안전하게 상거래를 할수 있는 기지를 만드는 등, 현지 원주민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윌리엄스는 토착민들의 문화와 언어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토지 분규때 마다 평화 해결사가 됐습니다. 또한 종교적 관용과 개인적인 신념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윌리엄스로 인해 로드 아일랜드 식민지는 침례교, 퀘이커, 유대교 등 여러 신앙인들이 자유롭게 살수 있는 안식처가 됐습니다.
윌리엄스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1670년대가 되자 원주민과 백인 정착민들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됐습니다. 1675년에는 뉴잉글랜드 지역 여러 곳에서 이른바 필립왕 전쟁으로 불리우는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정착민들의 토지 점령과 원주민들에게 질병을 전파시켰다는 주장 등으로 인한 싸움이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70대가 됐지만 윌리엄스는 로드 아일랜드의 초대 총독이 됐습니다. 그러나 1676년 윌리엄스는 프로비던스가 불에 타자 자신이 그토록 애썼던 화해가 실패했다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스가 살아있는 동안 프로비던스는 재건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로비던스를 주도로 하는 로드 아일랜드가 번영하는 모습도 볼수 있었습니다.
로드 아일랜드는 면적이 약 4천 제곱 Km로 미국 50개 주 중 가장 작은 주이지만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13개 주의 하나가 된 역사 깊은 곳이 됐습니다. 특히 로드 아일랜드는 유럽인들의 북미주 정착 이래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를 정식으로 허용한 주였습니다.
윌리엄스는 1683년 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당시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농장에 묻혔고, 그의 농장은 폐허가 됐습니다. 거의 2세기가 지난 다음에서야 그의 매장지를 찾는 노력이 전개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묘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큰 나무 뿌리 하나만 묻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묘지의 잔해는 오늘날, 로드 아일랜드 역사 기념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그처럼 초라했지만 윌리엄스가 남긴 유산은 미국의 독립 전쟁 기잔 중 갈수록 그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갈수록 절실하게 깨달았고, 정부와의 분리의 장벽, 즉 wall of separation은 미국 제 1 수정헌법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