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는 미국 제 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미 카터는 미국 남부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 땅콩 농장을 경영하며 중앙 정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방 상원의원과 주 지사를 거치며 참신한 정책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결국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백악관의 주인이 됐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일단 백악관에 입성하자 세계 평화와 인류 복지를 위해 줄기찬 노력을 기울였으며,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한반도의 인권증진, 남북 화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퇴임 후에도 인도적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며 대통령 재임시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됐습니다.
지미 카터는 1924년 10월 1일, 미국 남부 조지아 주 플레인스라는 조그마한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정식 이름은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 (James Earl Carter, Jr.)였습니다. 지미 카터의 집안은 침례교도로 신앙심이 매우 깊었습니다. 지미 카터는 조지아 공과대학을 다닌 다음, 1943년 메릴랜드 주 애나폴리스에 있는 미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해군사관학교는 신입생 시절 대단히 군기가 센 전통을 갖고 있었지만 조용한 생도인 카터는 이를 잘 견뎠고 성적도 좋았습니다. 그는 생도 시절 여동생의 친구인 로절린 스미스와 사랑에 빠졌고, 1946년 졸업하던해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3남 1녀를 두었습니다. 해군 장교가 된 지미 카터는 대서양 함대, 태평양 함대 등에서 전함과 원자력 잠수함 승무원으로 복무했습니다.
지미 카터는 7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53년 대위로 전역했습니다. 고향 플레인스로 돌아온 지미 카터는 땅콩과 목화 농장을 운영해 상당한 돈을 모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땅콩농부, Peanut Farmer 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카터는 1962년 민주당 소속으로 지방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카터는 미국에서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주 상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로부터 8년 후에는 조지아 주 지사에 당선됩니다. 미국 남부 지방의 젊은 지사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한 그는 환경을 개선하고, 주 정부의 능률을 높이며, 인종 차별을 제거하는 등 참신한 정책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1974년 카터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카터가 누구야?” 할 정도로 그는 정계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2년 동안 열심히 지지 확보를 위해 노력하면서 차츰 지명도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당의 후보를 결정하는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비교적 쉽게 1차 투표에서 당 후보로 뽑혔습니다. 지미 카터는 미네소타 출신 월터 몬데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습니다. 공화당의 경쟁 상대는 제럴드 포드 현직 대통령이었습니다. 세 차례나 텔레비젼 토론을 하는 등 치열한 선거전에서 카터는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그 결과 297대 241의 선거인단 표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1977년 1월 20일 제 39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녹취: 취임식 Music
카터 대통령은 백악관에 입성하자 인플레이션과 실업 등 경제 문제를 개선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그 결과 임기 마지막 무렵에는 거의 8백만개의 일자리가 늘어났고, 예산 적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일플레이션과 이자율은 거의 신기록을 수립할 만큼 높아졌습니다. 이것을 낮추기 위한 노력은 단기적이지만 경기 침체를 불러왔습니다.
국내 정치에서 카터 대통령은, 눈에 띄는 여러가지 업적을 남겼습니다. 에너지 부족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그는 전국적인 에너지 정책을 수립하는 한편 국내산 석유에 대한 가격 통제를 해제함으로써 생산이 늘어나도록 유도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정부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고, 트럭 운송과 항공업계에 대한 규제도 풀었습니다.
환경 개선을 위해서는1억 3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알라스카의 대지를 보호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국립공원 시스템을 확대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인문, 사회복지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연방 교육부를 신설하고, 사회복지 제도를 확대했습니다. 정부 공무원으로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 흑인, 중남미계 직원을 고용한 것도 카터 행정부 때였습니다. 월남전을 반대하며 군 징집을 기피했던 젊은이들도 사면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외교정책에서 자신의 독특한 철학을 추구했습니다. 인권을 중시하는 그의 노선은 소련 등 일부 나라로부터 차가운 반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78년 미국에 있는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을 주선하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파나마 운하 협정 비준도 커다란 성공이었습니다. 그는 전임 정부의 뒤를 이어 중화인민 공화국과의 외교 개선에 힘을 써, 완전한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재임 중, 한국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한국의 군사정부에 의한 인권 탄압에 거듭 우려를 나타냈고, 주한 미군을 철수하려는 계획도 추진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한국이 이제는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요 지휘관들의 반응과 정보 보고들이 그러한 계획을 뒷받침 해주지 못하게 되면서 철수 계획은 무산됐습니다.
소련과의 중거리 핵 미사일 제한 협정, 즉 SALT II협정을 성사시킨 것도 큰 성과로 꼽힙니다.
그같은 성취가 있었음에도 심각한 몇가지 문제는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SALT II 협정의 비준을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79년 이란주재 미국 대사관이 시위대에 점령당하고 대사관 요원들이 인질로 억류됐습니다.
녹취: 대사관 공격
이 사건은 카터 대통령 재임 마지막 14개월 내내 뉴스의 촛점이 됐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인질석방을 위해 어려운 협상을 계속했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1980년 대선에서 카터 재선 실패의 주 요인이 됐습니다. 이란은 카터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는 날 52명의 인질을 석방했습니다.
2차 임기 도전에 실패한 카터 대통령은 1981년 백악관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은 퇴임 후 인도주의 활동에 전념하면서 재임시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으며,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전임 대통령 중 한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Habitat for Humanity 라는 기구의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Habitat for Humanity는 미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의 집 없는 사람들에게 거주지를 마련해주기 위한 자선 기관입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직접 망치를 들고 봉사자들과 함께 건축공사를 했습니다. 2011년11월에는 노구를 이끌고 부인 로절린 여사와 함께 아이티 지진 피해 현장을 찾아가 난민들에게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Act: 주택 건설
카터 전대통령은 부인과 함께 집을 지어주는 일을 20년째 하고 있다며, 이번에는 미국에서 온 500명의 봉사자들과 함께 800채의 주택을 건설 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카터 센터를 설립하고 세계의 인권 향상, 보건 제도 개선, 민주제도의 실현, 평화 증진 등 많은 분야를 돕는데 앞장섰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미북 관계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과 북한이 단계적 방식으로 비핵화를 추진해 북한이 궁극적으로는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하고 미국도 북한에 평화를 보장하고 제재를 해제하는 해결 방안을 추진했습니다. 1994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NPT를 탈퇴하고 한반도에 핵전쟁 위기감이 높아졌을 때는 미국의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담판을 가진 카터 전 대통령은 핵 개발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 약속은 같은 해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 기본합의를 맺을 수 있는 토대가 됐습니다. 그러나 김주석이 사망함으로써 미북 관계는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2010년 2차로 북한을 방문해 그곳에 억류중인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 씨의 사면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이-카터 대통령은 2002년,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민주주의와 인권의 증진, 경제와 사회개발을 위해 수십년 동안 지칠줄 모르는 노력을 기울인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신은 우리에게 선택의 능력을 부여했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Act: speech
“우리는 고통 해소의 길을 택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협동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변화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여러권의 저서와 자서전을 펴냈습니다. 그 중에는 ‘미국의 도덕적 위기’, ‘팔레스타인, 평화는 분리가 아니다’ 도 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한 영화도 출시됐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간암, 피부암 등으로 힘든 노년을 보내고 있지만 2023년 현재 98세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장수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고향인 조지아 주 자택에 머물고 있는 카터 전 대통령은 2023년 2월부터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호스피스 케어를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