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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불우한 환경 딛고 정상의 재즈 가수로, 빌리 할리데이


[인물 아메리카] 불우한 환경 딛고 정상의 재즈 가수로, 빌리 할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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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할리데이는 1900년대 전반에 활동한 미국의 정상급 가수입니다. 할리데이는 미국 재즈와 팝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친 음악인이었습니다. 할리데이는 성공한 가수이기는 했지만 어려운 환경으로 고통의 삶을 살다 일찍 저세상으로 간 불우한 여성이었습니다.

빌리 할리데이는 1900년대 전반에 활동한 미국의 정상급 가수입니다. 할리데이는 미국 재즈와 팝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친 음악인이었습니다. 할리데이는 성공한 가수이기는 했지만 어려운 환경으로 고통의 삶을 살다 일찍 저세상으로 간 불우한 여성이었습니다.

빌리 할리데이는 1915년 미국 동부 메랠랜드주 발티모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새디 페이건과 아버지 클라렌스 할리데이는 아주 젊은 나이에 빌리를 낳았습니다. 빌리의 어렸을 때 이름은 엘리노라였습니다. 아버지 할리데이는 초기 재즈 악단의 멤버로 늘 공연 여행을 다니느라 집을 비우는 날이 너무 많았습니다. 결국 이들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새디 페이건은 남의 집 청소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가족을 먹여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디는 딸을 가족과 함께 발티모어에 두고 임금이 높은 뉴욕으로 갔습니다.

어린 소녀 엘리노라는 영화배우 빌리 도브를 좋아해 이름을 빌리로 바꾸었습니다. 빌리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시간만 나면,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습니다. 빌리의 집 근처에는 여자들이 몸을 파는 여관이 하나 있었고, 그곳에는 레코드 판을 트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빌리는 노래를 듣고 싶어 그 여관의 청소 일을 자청했습니다. 빌리는 거기서 처음으로 1920년대 유명 흑인 가수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베씨 스미스가 부르는 블루스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연주도 들었습니다. 이들 두 음악가는 빌리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빌리 할리데이는 “나는 가수가 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관악기를 연주하고 싶었다. 노래만 하기는 싫었다. 나는 내가 편한 방식대로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1930년대에 부른 그의 인기 곡 중 하나는 “More Than You Know."입니다.

빌리는 불우한 여성이었습니다. 빌리는 불과 10살때 어떤 남자로부터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이 바로 빌리라는 혐의를 받고, 어린이 교도소로 보내졌습니다. 1927년 빌리는 뉴욕의 흑인 빈민가인 할렘에서 어머니와 합류했습니다. 빌리의 어머니는 실수로 딸을 아동 보호소에서 살게 만들었습니다. 빌리는 불과 13살에 윤락녀가 됐습니다. 어느 날은 남성의 요구를 거절하다 체포돼 4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빌리의 어머니는 병석에 눕게 됐습니다. 이제 어머니가 일을 못하니 빌리가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다 할렘의 한 술집에서 노래 부르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17년 동안을 할리데이는 나잇클럽 가수로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할리데이는 뉴욕의 나이트 클럽 업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 중 한명이 됐습니다.

빌리는 언제나 긴 흰색 이브닝 드레스는 입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Lady Day”, 즉 “숙녀 데이”라고 호칭했습니다. 1930년대 초, 존 해먼드라는 음악 프로듀서가 어느 나이트 클럽에서 빌리의 노래를 듣게 됐습니다. 그는 빌리의 노래가 지금까지 들어본 어떤 재즈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유명 인사들도 불러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도록 했습니다.

해먼드는 할리데이의 최초 음반을 제작했습니다. 이를 위해 해먼드는 당대 최고의 재즈 음악인들을 동원했습니다. 클라리넷의 베니 굳먼, 피아노의 테디 윌슨, 색소폰의 벤 웹스터가 여기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빌리 할리데이의 여러 유명곡을 녹음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저 달에 가봤으면 하는 의미의 I Wished on the Moon입니다.

1930년대 말, 빌리 할리데이는 아티 쇼 악단과 함께 미국 전 역을 순회 공연했습니다. 빌리는 백인 악단과 함께 공연을 하는 초기의 가수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흑백 분리법으로 그같은 공연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 무렵 뉴욕의 그린위치 빌리지라는 곳에 Café Society라는 새로운 나이트 클럽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클럽은 미국 최초로 흑인과 백인 음악가들이 함께 공연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빌리도 여기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클럽은 흑백 가리지 않고 고객을 받아들였습니다.

학교 교사 루이스 앨런이 작곡한 Strange Fruit, 즉 “이상한 과일”이라는 노래를 빌리 할리데이가 처음 부른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미국 남부에서 행해지고 있는 흑인에 대한 부당함과 억압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가사에는 백인 폭도들이 흑인들을 나무에 매달아 살해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어떤 대중 음악과는 다른 이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노래는 크게 히트했습니다.

1940년대 할리데이는 불법 마약인 헤로인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할리데이의 몸은 점점 더 많은 헤로인을 요구하면서 망가져 갔습니다. 1947년 빌리 할리데이는 불법 약물 소지로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이어 유죄 판결을 받고 9개월간 감옥 신세를 졌습니다. 복역을 마치고 풀려났지만 뉴욕 시 당국은 그녀에게 술을 파는 어떤 곳에서도 공연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할리데이에게 나이트 클럽이나 재즈 클럽에서 노래를 할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 공연장이란 극장이나 콘서트 홀 밖에는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지 열흘이 지난 후 할리데이는 뉴욕의 유명 음악홀인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려 오는 사람들로 공연장은 가득 찼습니다. 그곳에서 부른 노래 중 하나가 I Cover the Waterfront였습니다.

1956년 빌리 할리데이는 자신의 일생을 책으로 펴냈습니다. 책의 제목은 Lady Sings the Blues, “블루스를 노래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뉴욕 포스트 신문에서 일하는 한 친구가 자서전 집필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할리데이는 몇개월 후 다시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그러나 할리데이는 교도소 수감 대신 중독 치료 과정을 이수하게 됐습니다. 그녀의 마약 의존도를 줄이는 치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같은 해 그녀는 두번째 카네기 홀 공연을 가졌습니다. 여기서 부른 곡중 하나는 Lady Sings the Blues였습니다.

Lady Sings the Blues

할리데이의 몸은 그동안 너무 많은 마약과 술로 망가져 있었습니다. 1959년에는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열렸습니다. 이때 그녀는 겨우 두곡을 부르고 무대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44세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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