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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도시 빈민가 개혁에 앞장선 언론인, 제이콥 리스


[인물 아메리카] 도시 빈민가 개혁에 앞장선 언론인, 제이콥 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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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년대에서 1900년대로 넘어가던 시기의 미국. 언론인이자 다큐멘터리 사진기자였던 제이콥 리스는 도시 빈민가의 참상을 폭로하고 이를 개선하는데 일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그는 도시 수질 개선, 아동 금지법 제정 등에도 앞장선 사회 개혁 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1800 년대에서 1900년대로 넘어가던 시기의 미국. 언론인이자 다큐멘터리 사진기자였던 제이콥 리스는 도시 빈민가의 참상을 폭로하고 이를 개선하는데 일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그는 도시 수질 개선, 아동 금지법 제정 등에도 앞장선 사회 개혁 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1887년 봄, 한 젊은이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으로 항해했습니다. 그 젊은이는 덴마크 출신 21살의 제이콥 리스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미국에 도착해 무척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할 각오가 돼 있었지만 일 자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제이콥은 일자리를 구하러 많은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농장에서도 일하고, 탄광에서도 일하고, 벽돌 공장에서도 일했습니다. 길거리에서 행상도 했습니다.

머지 않아 그는 희망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뉴욕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뉴욕시의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의 북쪽 지역인 브롱크스에 도착했을 때 발이 부르터 극심한 통증이 왔습니다. 거기다 배도 고팠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제이콥은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I had not eaten a thing since the day before. I had no breakfast, and decided to have a swim in the Bronx River, instead.

“나는 그저께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침이 됐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아침 먹을 생각을 잊으려고 브롱크스 강에 들어가 헤엄을 쳤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물에서 나오니 배고픔은 여전했다. 그러다 그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학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포담 대학교였다. 학교의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그냥 피로했고 할 일도 없어, 아무런 생각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포담 대학교는 가톨릭 대학입니다. 그때 나이 많은 가톨릭 수사가 그에게 닥아왔습니다. 그는 친절한 목소리로 배가 고프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수사는 음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제콥은 나중에 까지도 그때의 인자했던 수사의 모습이 꿈에 나타나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제이콥이 수사를 본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제이콥의 종교는 루터교였기 때문에 가톨릭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일기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I ate the food that was brought to me. But I was troubled. I was afraid that after giving me food, the churchman would ask me to change my religious beliefs.

“나는 그가 준 음식을 다 먹고 나자 불안해졌다. 먹을 것을 주고 종교를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을까? 그런다면 안바꾼다고 해야지.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곳을 떠날때 수사는 더 많은 음식을 싸주었다. 나는 친절을 베풀어준 가톨릭 수사의 배려에 의혹을 했던 나 자신에 화가 났다.”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제이콥은 사람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좋게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여러 곳을 전전하던 제이콥은 뉴욕시에 있는 신문사 기자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제이콥이 평생을 바친 전문 직업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신문사는 그에게 경찰서 취재 임무를 주었습니다.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제이콥은 최악의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특히 멀베리 벤드 (Mulberry Bend)라는 지역의 상황은 처참했습니다. 제이콥의 글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It was no place for men and women. And surely no place for little children. It was a terrible slum -- as such places are called -- where too many are crowded together,

“그곳은 남자나 여자나 살곳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살수 있는 곳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곳은 지독한 빈민가였다. 집과 거리는 더럽고 쥐가 들끌었으며, 집집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었다. 나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멀베리 벤드가 얼마나 처참한 곳인지 몰랐다. 나는 신문 기자였기에 그곳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어둡고 더러운 그곳 거리와 집들을 들여다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속에 살고 있는지를 보았다. 나는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상황을 기사로 썼다.”

제이콥은 경찰 출입기자로서 일을 잘했고, 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 취재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편집장은 그걸 허락하지 않고, 계속 멀베리 지역을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멀베리가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편집장의 말은 사실로 증명됐습니다. 제이콥 리스는 멀베리 벤드와 같은 빈민가 거주지를 개선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멀베리 벤드의 실상을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 카메라 기술을 배웠습니다. 당시의 카메라는 요즘 카메라에 비하면 질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제이콥은 플래쉬를 터뜨려 사진을 찍는 방법을 최초로 개발해 가며,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I made good use of them quickly. Words could get no action to change things. But the pictures did.

“나는 카메라 작동법을 최대한 빨리 배웠다. 문자는 변화를 가져오는데 아무런 행동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일으켰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충격은 대단히 강력한 것이어서 시 당국자들을 움직이게 했다. 카메라는 멀베리 벤드 상황을 개선하는데 강력한 나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도시 빈민가의 열악한 모습을 담은 여러권의 사진집을 내며 제이콥 리스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원조가 됐습니다. 그는 신문과 잡지에 글과 사진을 싣는가 하면 강연을 다니며 여러 해 동안 빈민가 정화운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것은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적인 카메라 영상과 강력한 글은 멀베리 벤드 빈민가를 제거하는 법을 제정하는 촉진제가 됐습니다. 뉴욕시는 최초로 빈민가 주택법을 만들어 문제 해결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길고 어려운 싸움이었지만 결실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멀베리 빈민가의 건물들은 제거되고 그곳은 공원으로 변했습니다.

"When they had fixed the ground so the grass could grow, I saw children dancing there in the sunlight.

“그곳을 정화하자 땅에서 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이 잔디 밭에서 태양 아래 춤을 추며 노는 것을 볼수 있었다. 그 아이들은 이제 좀더 나은 환경에서 살수 있을 것이다. 춤추며 노는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범죄와 살인으로 가득찼던 그곳이 이제는 시에서 가장 질서있는 지역으로 변했다.”

제이콥은 이렇게 계속했습니다.

The murders and crimes disappeared when they let sunlight come into the Bend. The sunlight that shone upon children who had, at last, the right to play.

“태양 빛이 벤드를 비추자 살인과 범죄는 사라졌다. 그곳을 비치는 태양은 행복하게 놀수 있는 권리를 아이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멀베리 벤드 공원의 의미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데 다소나마 일조를 했다는데 나는 대단히 행복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깨끗하고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주기 위한 리스의 마지막 투쟁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애정도 그의 에너지 만큼이나 넘쳤습니다. 그는 뉴욕 주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뉴욕의 수질이 주민들에게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주 정부 관리들에게 증명해 보였습니다. 주 당국은 그 문제에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동 노동 금지법 제정과, 그 법이 준수되도록 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리스가 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때는 아동 노동 금지법이라는 것이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어린이들에게 공기가 나쁘고 어두운 곳에서 장시간 일을 시킨다 해도 반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많은 나라에서 불법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까지는 제이콥 리스같은 사람들이 있었기때문입니다.

그는 어린이 놀이터 마련에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노인들을 위한 교육 센터와 놀이 장소를 마련하는 제도도 추진했습니다.

1890년에는 그의 저서 “다른 반쪽의 삶”이 출간됐습니다. 그는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그의 저서와 신문 기사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리스가 도시 개혁에 정렬을 바치고 있을 때, 나중에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뉴욕시 경찰국장으로 재직중이었습니다. 루즈벨트는 리스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의 고문을 자원했습니다. 루즈벨트는 리스를 뉴욕 시에서 가장 유용한 인물이라고 평했습니다. 리스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한 곳의 열악한 상황에 관해 계속 글을 썼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포함한 12권의 저서는 도시의 상황을 개선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러권의 사진집도 냈습니다.

저서로 유명해진 제이콥 리스는 수 많은 도시들로부터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글을 쓰고 강연을 계속하는 강행군으로 그는 건강이 크게 악화됐습니다. 부인과 함께 매사츄세츠의 농장에서 머물고 있던 제이콥 리스는 1914년 65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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