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가능 링크

[인물 아메리카] 가장 사랑받는 현대 미국 시인 중 한 사람, 로버트 프로스트


[인물 아메리카] 가장 사랑받는 현대 미국 시인 중 한 사람, 로버트 프로스트
please wait

No media source currently available

0:00 0:10:30 0:00
다운로드

이 시간에는 현대 미국 시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사랑을 받은 문단의 거목 중 한 사람, 로버트 프로스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61년 1월 20일, 존 F.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

선서가 끝나고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노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케네데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는 시를 낭송하고 있습니다.

“The land was ours before we were the land's.

She was our land more than a hundred years

Before we were her people. She was ours

In Massachusetts, in Virginia,

But we were England's, still colonials,”

“우리가 이 땅의 사람이기 전부터 이 땅은 우리의 것이었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식민지 상태를 투쟁으로 극복하고 개척의 역사를 일구어 온 미국에 대한 자부와 결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The Gift Outright, 확실한 선물이라는 시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자신의 취임식 날,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시인 중 한 사람인 로버트 프로스트에게 이날을 기념하는 시를 직접 낭송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날씨는 춥고 햇볓이 눈 부신 그날, 연로한 시인 프로스트는 흰 종이에 햇빛이 너무 반사돼 특별히 준비한 시를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프로스트는 대신 자신이 외우고 있는 The Gift Outright를 낭송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20세기 미국 최고의 국민 시인으로, 4회에 걸쳐 퓰리처상을 받은 그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시는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만큼 널리 읽혔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명성을 얻은 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프로스트는 늘 시 속에 미국 북동부, 뉴 잉글랜드의 추운 겨울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1874년 대륙의 반대 편인, 서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프로스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습니다. 아버지는 기자였던 아버지는 정치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는 술을 많이 마셨고 취하면 아들 로버트한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어머니는 늘 어린 로버트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로버트는 어렸을 때부터 어둠을 두려워했고, 일생 동안 상상 속의 병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프로스트의 어머니는 뉴잉글랜드 여성이었습니다. 남편이 사망하자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는 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길렀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독서와 시를 쓰는데 재미를 붙였습니다. 프로스트는 1891년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그해 학교에서는 프로스트와 엘리노어 화이트라는 여학생이 가장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3년 후 결혼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스트는 할아버지의 재정지원으로 명문 다트머스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불과 몇 달만에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몇년 동안은 공장 일, 구두수선, 학교 교사, 신문사 기자 등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시를 썼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서도 2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전에 하던 잡다한 일들을 하며 시를 썼습니다. 1913년 까지 글을 써서 번 돈은 1년에 겨우 10달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동안 프로스트는 뉴햄프셔 주에서 농장 일을 했습니다. 이일 저일을 하며 돌아다니는 동안 네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가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갈수록 아버지를 닮아가 가족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도, 아내에게서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살까지도 생각했습니다.

1912년 그는 새로운 삶을 시도해 보기로 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갔습니다. 그곳 생활비는 쌌습니다. 프로스트는 영국에서 자신의 첫 시집을 내줄 출판사를 발견했습니다. 책 이름은 “A Boy's Will: 한 소년의 의지” 였습니다. 1913년 책이 나오자 영국의 독자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모국인 미국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찬사들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영국에서 살고 있던 또 다른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도 프로스트의 시를 읽고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는 잡지에 프로스트에 관한 글을 실었습니다. 또 미국에서 두번째 시집을 낼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North of Boston” 보스톤의 북쪽이라는 시집이었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보스톤의 북쪽”을 프로스트 최고의 시집으로 꼽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책이 첫번째 시집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사람들은 프로스트가 단순한 언어에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느꼈습니다. 그의 시는 보통사람들이 쓰는 평범한 말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1915년 두 시집이 미국에서도 출판됐습니다. 그는 시집이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자신도 돌아와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사람들의 찬사에 놀랐고, 출판사들의 환영에 놀랐습니다. 그는 뉴 햄프셔 주에 또 다른 농장을 구입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글을 쓰고, 대학에 강의도 나갔습니다.

프로스트는 언어의 장인이었습니다. 그는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똑 같이 표현하려 애썼습니다. 누구나 알아 듣는 말로 시를 썼습니다. 날씨, 나무, 계절, 낮과 밤 등 자연을 단순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가 초기에 쓴 “THE PASTURE” 즉 목장입니다.

I'm going out to clean the pasture spring;

I'll only stop to rake the leaves away

(And wait to watch the water clear, I may):

I shan’t be gone long. -- You come too.

I'm going out to fetch the little calf

That's standing by the mother. It's so young,

It totters when she licks it with her tongue.

I shan’t be gone long. -- You come too.

목장의 샘을 치우러 가려하오.

그저 낙엽이나 긁어 치울 생각이오.

그리고 맑아지는 물이나 지켜볼까 하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오. 당신도 갑시다.

어린 송아지를 데리러 가겠소.

어미 소 옆에 서 있지요. 너무 어려서

어미가 혀로 핥으면 비틀비틀 하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오. 당신도 갑시다.

프로스트는 유명인사가 됐지만 그것이 그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사고와 행동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점잖고 현명한 시 속의 인물은 바로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가족도, 프로스트가 시 속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자신의 세계는 슬픔으로 점철됐습니다. 그는 갈수록, 두려움을, 고독을, 갖고 있던 것을 상실해 가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자연을 읊은 그의 시 가운데는 겨울을 노래한 것이 다른 어느 계절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겨울의 시들은 자연에서 발견하는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저항의 순간, 변화의 순간, 고독한 사람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시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은 어두운 세상의 그림입니다.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인생의 마지막 몇년 동안 프로스트는 별다른 시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인간의 삶에서 시가 주는 가치를 대신 드러내 주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작가가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을 다 받았습니다. 퓰리처 상을 네번이나 받은 것은 시인으로서는 처음이었습니다.

예일 대학, 콜럼비아 대학, 다트머쓰 대학, 하버드 대학 등 여러 대학에서 40차례나 명예학위를 받았고, 1960년 미국 의회는 그에게 미국 문화에 끼친 공로로 금메달을 수여했습니다.

긴 생애 동안 프로스트는 시인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렸고, 미국 사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숨지고,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동생은 정신병원에 수용됐다 그곳에서 숨졌습니다. 아내도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프로스트의 여섯 자녀 중 큰 아들은 8살에 콜레라로 죽고, 둘째 아들은 자살했습니다. 세째딸은 정신질환, 네째딸은 출산 직후 숨졌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떠나가는 아픔을 간직한 채

로버트 프로스트는 1963년 1월 29일 전립선 수술 합병증으로 타계했습니다. 공허함에 사로잡혀 나그네처럼 떠나간 그의 유해는 버몬트 주에 있는 가족 묘지에 안장됐습니다.

XS
SM
MD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