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웨스팅하우스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제품과 아이디어를 내놓은 미국의 발명가이자 사업가 중 한 사람입니다. 웨스팅 하우스는 남북전쟁 후 미국의 산업발전기에 살았던 인물로 360개가 넘는 특허를 갖고 있었으며, 최근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그의 제품이 없는 가정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낸 사업가였습니다. 특히 그는 토마스 에디슨의 아성에 도전해 교류, 즉 AC를 국가적인 전기 공급방식으로 정착시킨 혁신적인 사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정식 이름은 조지 웨스팅하우스 주니어(George Westinghouse Jr.) 입니다. 1846년 뉴욕주 센트럴 브릿지(Central Bridge)에서 아버지 조지 웨스팅하우스 시니어와 어머니 이멜라인 웨스팅하우스(Emeline)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발명가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농업기계를 설계하고 제작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아들 웨스팅하우스 주니어는 언제나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내는데 재미를 느꼈고 열심이었습니다.
남북전쟁 중이던 1862년, 그는15살밖에 안됐지만 정식 교육은 다 중단하고 뉴욕 방위군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북군에 들어가 싸우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들은 아들을 적극 설득해 집으로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지 1년을 넘기자마자 다시 북군에 입대해 해군 공병부관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는 1865년 전쟁이 끝난 후 제대했습니다.
군대를 마친 후 뉴욕으로 돌아온 웨스팅하우스는 유니온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학과목들이 마음에 들지않아 자퇴를 하고 혼자 공부를 하며 기계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학교보다 훨씬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나이가 19살에 불과한데도 그는 회전식 증기엔진을 만들어 특허를 따낸 것입니다. 그가 일생동안 따낸 총 361개의 특허 중 첫번째 기록이었습니다.
그는 또 말 대신 수레를 끄는 농기구, 원통형 증기 차를 만들었습니다. 21살때는 선로를 이탈한 차량이 다시 선로로 올라설 수 있도록 유도하는 car replacer를 발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reversible frog라는 명칭의 선로 교체기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건 열차에 쓰이는 공기 브레이크였습니다. 당시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계속되는 열차 사고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습니다. 차량마다 제조사가 달라 브레이크 작동 속도가 같지 않았고, 정차를 할때 차량들이 서로 부딛치는 대형 사고들이 잇따라 발생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객차마다 압축공기를 보내 브레이크를 한번에 제어하고 모든 차량이 동시에 설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개발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1869년에 "웨스팅하우스 공기 브레이크"사를 설립하고 수 많은 열차에 그의 브레이크를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개발한 공기 브레이크는 대형 육상교통수단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 열차들이 신속하게 선로를 바꾸어 충돌 없이 운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로써 웨스팅하우스는 전국적인 명성과 부를 얻게 됐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더 나아가 선로 콘트롤이나 브레이크를 전자식 시그널로 바꾸는 아이디어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882년 자동식 철도 신호기를 개발했습니다. 사람이 오일 램프를 들고 신호를 하는 구식 신호를 전기와 개스로 작동하도록 교체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현대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되는 천연가스의 파이프 운송에 관한 기술도 개발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필라델피아에서 천연 가스를 시추했습니다. 천연 개스가 유정을 나오면, 압력이 높아져 위험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천연 가스가 분배 파이프에서 나오도록 하는 감압 밸브를 발명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미국 최초의 광범위한 천연 가스 공급 시스템을 갖게 됐습니다.
그같은 개발로 웨스팅하우스는 미국 내 유수의 기업가로 올라섰습니다. 그는 당시 세계 여러 곳에 61개의 공장과 하부 공작창을 개설했습니다. 웨스팅하우스의 수도라 불리우던 펜실배니아 주의 핏즈버그 시에 있는 3개의 공장에만도 약 6천명 내지 9천명의 종업원들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공장 부근에 있는 윌머딩 (Wilmerding)이라는 마을에 YMCA를 세우고 평생 교육, 직업훈련을 실시했으며, 회사 직원들에게 그곳에서 리크리에이션을 즐기도록 했습니다. 그는 일요일 외에 토요일 오후도 직원들에게 휴무 제도를 실시해 생산성을 높이도록 한 최초의 대기업 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은퇴연금, 실업수당, 주택 마련 계획 등을 제공해 직원들이 웨스팅하우스에서 일하는데 긍지를 갖도록 했습니다. 당시 핏즈버그의 철강 산업계 거물, 앤드루 카네기나 헨리 클레이 프리크 등에 비해 웨스팅하우스는 인정이 많은 사장이라는 평판을 받았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공기 브레이크 개발 도중 전기를 사용하다 직류, 즉 DC보다 교류, AC가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후부터는 교류의 실용적 이용 방식을 개발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당시의 전기 산업은 토마스 에디슨의 DC방식과 그의 기업 제너럴 일렉트릭이 꽉 잡고 있었습니다. 자연 양측 사이에는 세칭 Electric War로 불리우는 전류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에디슨에 대한 웨스팅하우스의 도전은 마치 어린 아이와 어른의 싸움 같았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이 사용하는 직류는 전류의 크기와 방향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고 항상 일정합니다. 직류는 전압의 세기가 일정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기기에 손상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장을 할수가 있어 손전등에 쓰이는 건전지 처럼 발전 장치가 없이도 전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DC는 장거리 송전이 어렵습니다. 발전 장치에서부터 4.8km 정도 이상은 보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당시 뉴욕에 전력을 공급하던 에디슨의 방식은 수 많은 소형 발전소를 갖고 있어야 했습니다.
반면 웨스팅하우스는AC방식으로 얼마든지 멀리 전기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원거리의 대형 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해 송전선을 통해 그것을 도시로 보내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또 그렇게 보내는 강력한 전기를 공장이나 가정에서 사용하기 알맞게 조정할수 있는 변압기를 개발했습니다. 웨스팅하우스 사와 에디슨의 제네릭 일렉트릭 사는 자기들의 방식이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에디슨을 지지하는 측은 AC 방식이 위험하고 건강에 해롭다는 대대적인 선전을 전개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은 법정으로 번저 7년이라는 긴 세월 공방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AC 방식이 더 우월한 기술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1895년 뉴욕주 나이아가라 폭포에 최초의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발전소에서 35km 떨어진 버팔로 시 일대에 전력을 공급했습니다. 전력 공급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기록이었습니다.
뒤를 이어 웨스팅하우스는 이어 여러 곳에 발전소를 세웠습니다. 특히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 AC 전력을 공급하자 웨스팅하우스 방식은 대세를 굳히게 됐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1904년 센트루이스 세계박람회 계약도 따 냈습니다. 이로써 1907년까지 웨스팅하우스는 미국의 전류 시장을 장악하는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이로써 그는 현대 전기 보급망의 아버지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그 이후에도 웨스팅 하우스는 혁신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886년 공식 설립된 웨스팅하우스 전자회사, Westinghouse Electric and Manufacturing Company는 출범10년 사이 실질자산 1억 2천만 달러 규모로 커졌고, 직원 수는 5만명에 달했습니다. 그가 소유한 기업은 미국 여러 지역은 물론, 캐나다, 유럽에 까지 진출해 있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전기 기관차에서 텔레비젼 수상기, 전구, 세탁기, 주방 스토브에 이르는 다양한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또한 최초의 상업용 라디오 방송국을 개국하고 텔레비젼 방송국도 소유했습니다. 그후 웨스팅하우스 사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전 세계 원전 가운데 절반 가까이에 기술을 제공한 원전건설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한국 최초의 고리 원자력 발전소도 웨스팅하우스의 기술로 건설됐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세계 20여 개국에 원자로와 핵연료 제조, 원자력 관련 서비스를 위한 거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거대 기업을 창업한 웨스팅하우스도 1907년에는 사업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제불황이 일던 그해 10월 미국에서는 전국적인 공황이 몰아쳤습니다.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는 폭락하고 사람들이 서둘러 예금을 빼내는 바람에 은행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기업들은 연이어 파산했습니다.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웨스팅하우스 전자회사도 금융업체인 J.P. 모건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자신이 일구어 놓은 사업에서 손을 뗀 웨스팅하우스는 더 이상 아무런 사업에도 관여하지 않고 뉴욕의 자택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후 건강이 악화된 웨스팅하우스는 1914년 3월 12일, 67세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부인 마구에리트도 3개월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북전쟁에 참전한 조지 웨스팅하우스는 부인과 함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그가 살았던 집터는 핏즈버그 시에 기증돼 웨스팅하우스 공원이 됐습니다. 그가 일구어 놓은 사업체의 직원들은 돈을 모아 쉔리 파크에 웨스팅하우스 기념관을 설립했습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핏즈버그의 조지 웨스팅하우스 다리에는 ‘과감한 사고로 인류의 이익을 위해 헌신한 그의 생애와 개성을 상징하며 이 다리를 헌정한다’고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