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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공산주의 세력 팽창에 맞선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인물 아메리카] 공산주의 세력 팽창에 맞선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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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노시창입니다. 이 시간에는 냉전 시 세계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애를 쓰고, 한국전이 벌어졌을 때는 신속히 미군의 파병을 명령한 제 33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노시창입니다. 이 시간에는 냉전 시 세계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애를 쓰고, 한국전이 벌어졌을 때는 신속히 미군의 파병을 명령한 제 33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그다지 화려한 명성을 얻지 못한 평범한 대통령이라는 인상을 주는 인물입니다. 학력은 고등학교에 그쳤고,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가장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골치 아픈 일은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강한 소신으로 일관함으로써 인기순위에서 늘 상위 10등 안에 들고 어떤 조사에서는 6위를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해리 S. 트루먼은 1884년 5월 8일, 미국 중부 대평원 지대인 미조리 주 캔사스 시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존 트루먼과 어머니 마사 트루먼의 3남매중 장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노새 거래상인이기도 했습니다. 미조리 주 인디펜던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리 트루먼은 캔사스 시티로 가 은행에 취직했습니다. 1914년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농장을 관리했습니다.

1917년 미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그때 33살의 중년에다, 이미 국가방위군으로 두차례나 복무를 했지만 해리 트루먼은 주저없이 군대에 자원입대했습니다. 입대 1년 후 그는 포병 대대장으로 프랑스 전선에 파병됐습니다.

트루먼 대위 휘하의 장병들은 그의 용맹과 공명정대한 지도력에 감동돼 헌신적으로 그를 따랐습니다.

1919년 미국으로 돌아온 트루먼은 어릴 적 부터 알고 지내던 엘리지베스 월레스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엘리자베스는 베스 트루먼(Bess Truman)으로 불리웠습니다. 제대 후 트루먼은 군대 친구인 에드워드 제이콥슨과 함께 남성 의류사업을 시작했지만 1920년대 불어닥친 경제불황으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 또 다른 군대 친구가 트루먼을 캔사스 시티 민주당 간부인 토마스 펜더가스트(Thomas Pendergast)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트루먼은 1922년 카운티, 즉 한국의 군에 해당하는 지역의 판사 선거에 출마해 승리했습니다. 이로써 해리 트루먼의 정치인의 생애가 시작됐습니다. 사업에는 별 재미를 못본 그였지만 정치에서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34년 미주리 주를 선거구로 하는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부패한 펜더가스트 세력의 꼭두각시라는 인식 속에 상원에 등장한 트루먼이었지만 그는 친화적이고 성실한 성격으로 동료들로부터 호감을 샀습니다. 상원의원 재임 중 그는 두가지 중요한 법을 제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는 항공업계에 대한 정부의 감독 권한을 규정한 ‘민간항공법’ 또 하나는 철도산업의 개편에 정부가 감독을 하도록 하는 ‘윌러-트루먼 법’이었습니다.

1940년에는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트루먼 의원은 2차 임기중 미국 군대의 부정과 낭비를 조사하는 활동을 주도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습니다. 상원의 동료 의원들과 일반 국민의 지지를 얻게되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4년 4차 연임 선거에서 그를 부통령 후보로 선정했습니다. 루즈벨트- 트루먼 팀은 53%의 지지율로 46%를 지지를 얻은 공화당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습니다. 트루먼은 1945년 1월 20일 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통령 재임기간은 불과 82일로 끝났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5년 4월 12일 뇌출혈로 갑작이 사망함으로써 대통령직을 승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건강이 얼마나 악화됐는지 알지 못했던 (프랭클린) 대통령이

82일 동안 트루먼을 만나건 단 두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트루먼은 중책을 떠 맡을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외교정책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트루먼이었지만 그는 대형 관료체제를 이끌어갈 자질이 있었고, 언론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임기가 시작되자 트루먼은 즉각 열정적으로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국제연합 창설을 위한 헌장 초안 작성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 절차도 처리했습니다. 6월에는 독일 동부에 있는 포츠담으로 날아가 연합국 지도자들과 전후 독일 문제 처리를 논의했습니다.

포츠담에 있는 동안 트루먼 대통령은 뉴멕시코 주 로스 알라모스에서 원자탄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즉시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 아니면 전멸이란 최후 통첩을 보냈습니다. 대통령 보좌관들은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미군이 일본 본토를 침공한다면 약 50만명의 미국인이 희생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에 대한 원자탄 투하 작전을 승인했습니다.

원자탄 공격을 받은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9월 2일,태평양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10만명 이상이 사망한 원자탄 투하는 역대 미국 대통령의 결정 중 가장 논란 많은 것중 하나가 됐습니다.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 공산주의의 침략을 반대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트루먼 대통령의 외교정책은 ‘소련과의 협력관계’에서 ‘소련 세력의 봉쇄’로 바뀌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서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규모 원조를 제공하는 조지 마샬 국무장관의 이른바 ‘마샬 플랜’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여러가지 불리한 정황 속에서도 1948년 대선에서 49대 45% 지지율로 재선됐습니다.

예상밖의 승리로 재선된 트루먼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국내정책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공정한 거래라는 의미의 Fair Deal 계획 산하에는 공공주택, 교육, 최저임금인상, 연방차원의 민권보호, 국민건강 보험 등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들 관련 대부분 법안은 의회에서 부결되거나 약화되곤 했지만, 그후 수십년 동안 미국 국내 정책의 기틀이 됐습니다.

1949년 중국에서는 공산세력이 국민당 정부를 몰아내고 본토를 장악했습니다. 이 무렵 소련은 원자탄 실험에 성공해 미국의 독주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북대서양 조약기구, 나토의 창설을 주도하는 한편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을 서둘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38도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남침 불과 이틀 후 미국 공군과 해군에 대한민국 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또한 유엔 안보리 결정에 따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 사령관으로 삼고 공산군 퇴치작전을 지시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국민을 향한 라디오 연설에서 공산군의 침공은 독립된 국가를 차지하려는 공산세력의 야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며 미국은 그같은 침공을 물리쳐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사령관은 38도선을 경계로 한 종전 상태의 회복에 만족하지 않고 한반도 전체를 통일하려는 희망속에 압록강까지 북진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중공군이 강을 넘어 38선 이남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맥아더 사령관은 중국 영토를 원자탄으로 공격해 공산군을 물리치려 했습니다. 이-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을 해임하기까지 하면서 원자탄 사용을 저지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원자탄 공격을 승인하긴 했지만 그 자신 무고한 많은 인명이 살해된데 마음 아파했고, 중국에 대한 공격은 3차대전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맥아더 해임은 군대란 어디까지나 국민의 통제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용기있는 조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련이 동유럽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중국 본토가 공산화 되는가 하면 한반도에서도 미군이 확실한 승리를 달성하지 못하자 많은 미국인들은 냉전에서 미국이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따라서 트루먼 대통령의 인기는 폭락했습니다. 1952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은 차기 대선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미국 대통령의 3차 연임을 금지하는 수정헌법이 트루먼 대통령 재임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원하면 3선에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가 백악관을 떠난 1953년 1월 그에 대한 지지도는 31%에 그쳤습니다. 1945년 7월의 87% 지지율에 비하면 엄청난 추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약 20년 동안 트루먼의 인기는 다시 올라갔습니다. 그는 어려운 결정은 대통령인 자신이 직접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늘 책상위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즉 The Buck Stops Here!라는 유명한 문구를 새긴 명패를 올려놓고 일을 처리했습니다.

지극히 보통 사람인 그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느 누가 예상했던 것보다 우수하게 문제에 도전하고 이를 해결한 대통령이었습니다.해리 S. 트루먼은 당적에 관계없이 정치인들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얻었고, 보통 사람들의 표도 얻었던 것입니다.

임기를 마친 트루먼 대통령은 고향인 미조리 주 인디펜던스로 내려가 건강히 살다가1972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8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물 아메리카 이시간에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 편을 보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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