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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가장 덜 알려지고 가장 중요한 대통령, 제임스 K. 포크


[인물 아메리카] 가장 덜 알려지고 가장 중요한 대통령, 제임스 K. 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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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미국제 11대 제임스 포크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포크 대통령은 남북 전쟁을 치른 에이브래엄 링컨 대통령보다 5대를 앞선 대통령이었습니다. 1845년부터 1849년까지 단임으로 임기를 마쳤지만 그는 재임 중 미국 영토의 3분의 1 이상을 넓힌 커다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제 11대 제임스 포크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포크 대통령은 남북 전쟁을 치른 에이브래엄 링컨 대통령보다 5대를 앞선 대통령이었습니다. 1845년부터 1849년까지 단임으로 임기를 마쳤지만 그는 재임 중 미국 영토의 3분의 1 이상을 넓힌 커다란 업적을 남겼습니다.

포크 대통령은 오늘날의 텍사스, 뉴 멕시코, 캘리포니아, 오레곤 등을 미국에 합병함으로써 동부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서부 태평양 연안까지의 전 대륙을 통치하는 최초의 대통령이었습니다. 지방 의원과 주 지사를 역임했지만 워싱턴 정가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그는, ‘가장 덜 알려진 대통령이면서 가장 중요한 대통령’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제임스 녹스 포크는 1795년 11월 2일, 동남부 노스 캐롤라이나 주 메클렌버그(Mecklenburg)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지 20년도 채 안된 당시, 아직도 개척

중인 지역의 통나무 집에서 10남매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가족은 좀 더 서쪽인 테네시 주 콜럼비아로 이사를 갔습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측량기사와 농장주, 기업가로 성공해 부유한 집안을 이루었습니다.

포크는 키도 작고 몸도 허약했지만 머리는 명석하고 의지는 강했습니다. 포크는 1818년 명문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테네시 주 내쉬빌의 유명 변호사 밑에 들어가 법을 공부했습니다. 1920년에는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콜럼비아에서 법률 사무소를 열었습니다. 제임스 포크가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건 1823년 테네시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부터였습니다.

포크는 1824년 테네시 토박이 새라 칠드레스와 결혼했습니다. 부유한 가정의 딸로 교육을 많이 받은 여성이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아이를 두지 못했습니다. 새라는 남편의 정치 생애 내내 가장 가까운 조력자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나중에 대통령 부인이 됐을 때, 새라는 매력적인 퍼스트 레이디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많은 방문객들을 접대했지만 독실한 장노교 집안의 딸인 새라는 백악관에서 술을 금했고, 댄스, 연극 공연, 경마 등 오락을 자제했습니다. 남편이 키가 작아 모임에 등장할

때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일이 생기자, 대통령 입장 때 국가 수반 행진곡 Hail To The Chief를 연주하는 전통을 만들 정도로 사려깊은 여성이었습니다.

1825년 테네시 유권자들은 제임스 포크를 연방하원의원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는 무려 7차를 연임하면서 하원의장까지 올라갔습니다. 의회에 있는 동안 포크는 같은 테네시 출신이자 정당도 같은 앤드루 잭슨 제 7대 대통령의 열렬한 흠모자가 됐습니다. 잭슨 대통령은 수만년 동안 살아온 인디언 원주민들을 고향에서 몰아내고 광대한 지역을 백인의 영토로 만들어 비판도 받았지만, 유럽에서 온 개척민들에게는 영웅이었습니다.

포크는 그런 잭슨 대통령의 여러가지 정책을 지지했습니다. 각 주의 권리를 옹호했고, 합중국 은행, Bank of the United States를 해체했습니다. 대신 1846년 독립적인 재무성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1913년에 연방 준비 제도가 설립될 때까지 이는 국가 재정 제도의 기반이 됐습니다.

이처럼 포크가 열렬한 앤드루 지지자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앤드루 대통령의 별명인 Old Hickory, 늙은 고집쟁이를 빗대어 Young Hickory, 즉 젊은 고집쟁이라고 불리웠습니다.

포크는 1839년 의회를 떠나 테네시 주 지사에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이후 재선에서는 2회 연속 패배를 당했습니다.

주지사 선거에서 패한지 1년 후인 1844년 포크는 뜻밖에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습니다. 과거 한차례 대통령을 역임한 마틴 밴 뷰렌이 유력해 보였지만 재선에서 떨어진 기록 때문에 민주당은 그를 공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포크는 잘 알려지지 않은 후보 즉, 미국 최초의 다크 호스 대통령 후보가 됐습니다. 포크는 펜실배니아 출신 조지 달라스를 러닝메이트, 즉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습니다.

포크 후보는 켄터키 출신이며 휘그 당을 창당한 노련한 정치인 헨리 클레이와 대결했습니다. 휘그당은 “제임스 K. 포크가 누구야, Who is James K. Polk?” 라는 질문을 선거 구호로 내세웠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정치 경험이 없는 인물이라는 주장을 내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영토확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포크 후보의 텍사스 합병 공약을 환영하며, 그에게 표를 주었습니다. 포크는49.5%의 득표로 아슬 아슬하게 앞섰습니다. 그러나 선거인단 표결에서는 170대 105로 비교적 큰 표차로 이겨,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당시 제임스 포크의 나이는 49세. 그때까지의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었습니다. 일 벌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일을 열심히 하는 새 대통령은 즉각 과감한 정책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관세 인하, 독립적인 재무부 설립, 오레곤 영토확보, 캘리포니아와 뉴 멕시코 합병 등 크게 4가지였습니다.

포크 대통령이 취임하던 당시, 남부의 텍사스 문제 처리는 큰 과제였습니다. 멕시코 영토이던 텍사스는 미국인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한 상태였습니다. 이제 텍사스에게는 두가지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계속 독립 공화국으로 존재하는 것, 또 하나는 미국의 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멕시코는 당연히 독립이든 미국 편입이든 텍사스가 떨어져 나가는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도 텍사스의 미 합중국 합병을 반대했습니다. 미국 내에서도 포크의 반대파들은 노예 주가 더 늘어난다며 텍사스 합병을 반대했습니다. 선거운동 때부터 텍사스와 오리곤 전역을 미연방으로 편입시키겠다고 공약한바 있는 포크 대통령은, 텍사스 의회가 미국의 주로 편입되는 안을 통과시키자 주저없이 그 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면적 약 70만 제곱Km, 한반도의 3배가 넘는 땅이 미국 영토가 됐습니다.

1845년 텍사스가 미국에 합병되자 이제 남부 국경은 멕시코가 됐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는 또 긴장이 감돌았습니다. 포크 대통령은 국경선에 미군을 보내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멕시코에 리오 그란데 강을 국경선으로 인정해주면 멕시코가 미국민들에게 진 빚을 갚아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포크 대통령은 재커리 테일러와 윈필드 스콧 장군등을 보내 멕시코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는 이를 저지할 힘이 없었습니다. 결국 리오 그란데 강을 따라 국경이 확정되면서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아리조나, 뉴 멕시코, 콜로라도, 와이오밍 주 등 광대한 지역이 미국 영토가 됐습니다. 미국은 그 댓가로 천 5백만 달러를 멕시코에 주었습니다. 이곳에 살던 스페인계 시민들은 미국 시민이 됐습니다.

포크 대통령은 1846년 영국과 맺은 오레곤 조약에 근거해 또 하나의 거대한 영토를 합병했습니다. 이번에는 전쟁이 아니라 협상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오늘날의 워싱턴 주,

오레곤, 아이다호, 몬태나, 와이오밍 주가 미국 영토로 변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1846년에 아이오와, 1848년에 위스컨신 주도 미 합중국에 편입됐습니다.

그같은 과정에서 격렬한 반대와 비난도 있었지만 포크 대통령은 강력하게 확장정책을 밀고 나가 역사상 처음으로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도달하는 전 대륙을 미국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1차 임기 4년 동안에 약속했던 거대한 사업들을 모두 완성했습니다. 이외에도 포크 대통령 재임 중에는 해군사관학교, 스미소니언 연구소, 내무부 등 주요 기관이 등장했습니다.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1848년 재선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임으로는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자카리 테일러가 휘그 당 후보로 나서 당선됐습니다. 포크 대통령은 1849년 3월 백악관을 떠나 고향인 테네시 주 내쉬빌로 돌아갔습니다. 재임 중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포크 대통령은 퇴임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용맹하고 고집스럽던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1849년 6월 15일, 53세로 타계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아내에게

‘나는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했오’ 라고 말했습니다. 새라는 그후로도 40년 이상을 더 살았습니다. 포크 대통령의 유해는 내쉬빌의 포크 플레이스에 안장됐다가, 부인이 사망하자 함께 테네시 주 의사당으로 옮겨 안장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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