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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갈 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인물 아메리카]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갈 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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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는 제 2차 대전 중 미국의 태평양 사령관으로, 또,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한국 전쟁에서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써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한반도의 전세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6월은 한국 현대사에서 처절한 비극을 초래한 한국전쟁이 발발한 달입니다. 이 시간에는 제 1, 2차 세계대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20세기 거의 모든 주요 전쟁에 참전하며 전형적인 무장으로써의 명성을 떨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 2차 대전 중 미국의 태평양 사령관으로, 또,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한국 전쟁에서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써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한반도의 전세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확대문제를 놓고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은 끝에 해임돼 군복을 벗었습니다. 맥아더는 찬사와 함께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뛰어난 지휘관이며, 직선적인 무인이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1880년 1월 26일, 미국 남부 지방인 아칸소 주, 리틀 락 군 기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아더 맥아더와 어머니 메리 핑크니 하디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육군 장성으로, 개척지였던 그곳에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맥아더 가는 할아버지 때 부터 대대로 무장의 집안이었습니다. 맥아더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읽거나 쓰기도 전에, 말을 타고 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고 회상했습니다. 맥아더는 아버지의 근무지 이동에 따라 워싱턴 디시, 텍사스 등지로 옮기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1899년 맥아더는 육군 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에 들어가 비범함을 들어냈고, 1903년 육사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역사상 그보다 더 높은 점수로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든 단 두명이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남북 전쟁시 남군 사령관을 지낸 로버트 리 장군이었습니다.

맥아더는 공병장교로 임관됐습니다. 개척지의 경비와 진지 구축 등이 중요했던 당시, 군은 우수한 육사 졸업생을 공병부대에 배치하는 것이 추세였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소위로 맨 처음

복무한 곳은 필리핀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극동군의 장성으로 있던 때였습니다. 그 후 아버지의 보좌관으로 아시아 지역과 미국 내 여러 기지에서 초임 장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1914년에는 멕시코의 베라크루스 점령 작전에도 참전했습니다. 1917년 미국이 제 1차 대전에 참여하게 되자 맥이더도 미 제 42 “무지개”사단 소속으로 프랑스 전선에서 복무했습니다. 당시 그의 계급은 대령. 그는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업적을 기록하며, 금성, 은성 무공훈장을 비롯한 많은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후 맥아더는 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1919년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 웨스트 포인트 교장으로 임명됐습니다. 당시 그는 37세로 역대 최연소 기록이었습니다. 그는 1922년까지 재임하는 동안 학교를 현대화하기 위한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군인이지만 장교는 폭 넓은 교양인이 돼야 한다는 취지로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를 교과 과정에 추가한 것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1922년 맥아더는 부호 가문의 여성 루이스 크롬웰 브룩스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7년후 이들은 갈라서고, 1937년에 진 페어클로스와 재혼했습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1930년 맥아더를 대장으로 진급시켰습니다. 당시 50세인 맥아더는 사상 최 연소 대장 진급이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후버 대통령은 이어 그를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했습니다.

1935년 참모총장 임기를 마친 맥아더는 그해 미국의 자치령이 된 필리핀의 군대 조직에 착수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자신에게 미국 본토 근무령이 내려질 것을 알게된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해야 힐 일을 끝내지 않았다며 군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민간인으로써 필리핀의 마누엘 쿠에존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일했습니다. 쿠에존 대통령은 그를 필리핀 야전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1941년 일본의 위협이 점차 심해지자 정부는 맥아더에게 군 현역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맥아더는 극동군 육군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필리핀 방어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필리핀 군 병력을 함께 동원한 맥아더의 방어작전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41년 12월, 일본 공군기들은 진주만을 기습했습니다.

맥아더 군은 바탕 반도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후퇴한 미군은 이곳에서 지옥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194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호주로 대피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피리핀을 떠나면서 맥아더 사령관은 “I shall return,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다짐을 남겼습니다. 결국 필리핀은 일본군 수중으로 떨어졌습니다.

1942년 4월, 맥아더 사령관은 남서 태평양의 연합군을 총괄하는 총 사령관으로 임명됐습니다. 그로부터 2년 반 동안 맥아더 사령관은 넓은 태평양의 여러 섬을 오가며 수 많은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1944년 10월 맥아더 장군은 드디어 자신이 다짐한대로 필리핀을 회복했습니다.

두달후인 12월 맥아더는 태평양의 모든 군을 총괄하는 원수로 승진했습니다. 맥아더 군은 미군과 호주군이 주축을 이루었지만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국 등 일부 다른 국가 병력도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이 점차 세력을 잃어가는 가운데 미국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을 투하했습니다. 드디어 그해 8월 15일, 일본의 히로히토 국왕은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1945년 9월 2일, 맥아더 장군은 도쿄 만에 정박한 미조리 함상에서 정식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일본측에서는 시게무쓰 마모르 외무대신이 수석대표로 참석했습니다. 마모르 외무대신은 과거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독립투사의 폭탄 투척으로 다리를 잃은 외교관으로, 족발을 집고 항복식에 나왔습니다.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이 끝나고 맥아더 장군은 “이제 세계에 평화가 회복되었으니 하느님께서 언제까지나 이 평화를 보존해주시도록 기도하자”고 말했습니다.

2차 대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일본의 전후 문제를 수습하던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총 사령관으로 임명됐습니다. 북한군은 단시일내에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16개국 군대와 한국군의 지휘를 맡은 맥아더 장군은 일부 장교들의 조심스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인청상륙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의 허를 찌른 맥아더 장군은 여세를 몰아 압록강 중국과의 접경지대까지 진격했습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중국이 이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만난 맥아더 장군은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맥아더의 그같은 확신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1950년 11월과 12월 대대적으로 강을 건너 미군과 한국군을 공격했습니다. 유엔군은 다시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의 중부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에, 공산중국에 핵 폭격을 가하는 동시에 타이완의 국민당 군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할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대통령과 사령관 사이에는 이를 두고 갈등이 노골화했습니다. 1951년 4월 11일, 트로먼 대통령은 명령불복종으로 맥아더 사령관을 해임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귀중한 우리 군인들의 생명을 더 이상 소모하지 않을 것과, 세계평화를 불필요하게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 그를 해임한다고 밝혔습니다.

맥아더 해임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불만을 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국지전으로 묶어두려는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은 단호했습니다. 미국인들도 점차 맥아더의 정책과 요구가

아시아에서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임된 맥아더 장군은 1951년 4월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여러 도시에서 시가행진과 훈장수여 등 영웅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4월 19일 맥아더 장군은 상하양원 합동회의장에서 퇴임 연설을 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한국 정책을 비판한 맥아더 장군은 마지막으로 오래된 군가의 가사를 인용하며,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맥아더와 부인은 뉴욕의 왈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머물렀습니다. 맥아더는 1952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공화당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택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64년 4월 5일, 워싱턴 디시에 있는 월터 리드 육균병원에서 84세로 타계했습니다. 그리고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 묘지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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