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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첫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인물 아메리카] 첫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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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얼마전 타계한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생애를 되돌아 보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지난 달 23일 타계한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생애를 되돌아 보겠습니다.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1990년대 미국 외교를 진두 지휘했으며, 특히 2000년 10월에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을 갖고 미-북 정상회담, 핵과 미사일 문제 등을 논의했습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1937년 5월 15일, 체코슬로바키아 수도 프라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 이름은 마리아 야나 코르벨로바 (Marie Jana Korbelova)였습니다. 아버지는 학자이자 외교관이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장악하자 아직 어린 아기인 매들린의 가족은 영국으로 대피했습니다. 그러나 매들린 가의 할아버지는 유태인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매들린 올브라이트

2차대전이 끝나고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와 채 정착을 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소련이 체코를 장악했습니다. 매들린 가족은 다시 나라를 떠나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 정착했습니다. 외교관이자 언론인이었던 매들린의 아버지 조셉은 덴버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매들린은 어려서부터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세계 문제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아버지 조셉 코르벨의 제자 중에는 나중에 또 한명의 여성 국무장관이 된 콘돌리자 라이스도 있었습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자신이 외교관 가정에서 자랐으며 국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명석한 매들린은 미국동부 매사츄세츠 주에 있는 명문 웰슬리 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갔습니다. 정치학을 전공한 매들린은 학교 신문 편집을 맡기도 했습니다. 어느 해 여름 매들린은 일간지 덴버 포스트에 인턴으로 일을 하게 됐습니다. 이때 같이 인턴으로 일하던 출판사 아들 조셉 올브라이트를 만났습니다. 1959년 매들린은 웰슬리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곧 이어 조셉 올브라이트와 결혼했습니다.

그후 여러 해 동안 남편 조셉이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이들 부부는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러시아 어와 국제관계를 공부했습니다. 세딸을 키우면서도 열심히 공부한 매들린은 1968년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러시아 어로 석사, 공공법과 정부학으로 1976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학생이었던 1972년 올브라이트는 민주당의 에드몬드 머스키 상원의원의 입법 보좌관으로 일하게 되면서 처음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로부 터 4년 후 올브라이트는 지미 카터 대통령 행정부에서 국가안보회의에 들어갔습니다. 과거 그녀의 교수였던 즈비그뉴 브리젠스키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있으면서 발탁을 한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 민주당이 여당의 자리를 내어준 후 올브라이트는 워싱턴에 있는 여러 비영리 단체에서 일했습니다. 이어 워싱턴의 명문 조지타운 대학교의 국제관계학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올브라이트 교수는 그곳에 있으면서 네 차례나 올해의 교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올브라이트 부부에게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성과 교제를 하면서 두 사람 관계는 이혼으로 끝났습니다. 올브라이트 여사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혼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러면서도 꿋꿋했습니다. 그의 개인적 생애로서나, 사회적 활동 등에서 이혼은 전혀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올브라이트는 자신의 집에서 민주당 엘리트들이 모여 그날 그날의 이슈를 토론하는 많은 모임을 열었습니다. 특히 외교정책 면에서 올브라이트는 당의 주목을 받는 인사로 떠 올랐습니다. 1988년 올브라이트는 마이클 두카키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그의 보좌관으로 활약했습니다.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올브라이트를 유엔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했습니다. 영어는 물론, 러시아어, 체코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8개국어를 구사하는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4년 재임 동안 미국의 국제적 리더쉽을 추구하는 유능한 외교관으로 떠 올랐습니다. 올브라이트 대사는 The New Republic지와의 인터뷰에서 국제정치와 다국적 기구에서의 미국의 강력한 지도력은 클린턴 정부의 기본적인 신조라고 강조했습니다.

1990 년대 구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로 인해 발칸 지역에 심각한 분규가 발생하자 미국은 평화유지를 위해 보스니아에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이때 미군 파병에 대한 국제사회 설득에 적극 나섰습니다.

1994년에는 미군의 아이티 쿠데타 사건 해결도 적극 지원했습니다. 민주주의 유지 작전이라 불리운 이 사건은 2만명의 미군을 아이티에 파병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라울 세드라스 대통령을 실각시킨 다음 쫓겨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직 대통령을 복귀시킨 작전이었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2차 임기 중인 1996 년 12월 올브라이트의 국제 정치 분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외교 사령탑인 국무장관에 기용했습니다. 다음 해 1월 올브라이트 장관은 미국 제 64대 국무장관이자 사상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으로 취임했습니다.

재임 중 올브라이트 장관은 세계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력히 옹호했습니다. 또한 구 소련권 국가들이 북한 등 위험 국가에 핵무기를 확산시키지 못하도록 하는데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폴란드와 헝가리를 북대서양 조약기구 나토에 가입하도록 주도하면서 서방 군사동맹의 확대를 적극 추진했습니다.

1999년 구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에 따른 참혹한 민족적, 종교적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보스니아에 2만명의 미군을 파병하는 안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의 이해를 이끌어 내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외교관으로써 올브라이트 장관은 중국, 베트남 등과의 관계정상화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여러 아랍 국가들과의 협상을 이끌어낸 것은 중동 문제에서 이룬 괄목할 만한 성과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사건은 미 국무장관 최초의 북한 방문이었습니다. 북한 정권이 출범한 이래 평양을 방문한 최고위 미국 관리인 올브라이트 장관은 2000년 10월 23, 24 이틀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한반도 긴장완화, 북미 외교대표부 개설, 미사일 문제 등 양국 현안을 논의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평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위원장과, 미국이 북한의 위성발사를 지원하는 대신 북한은 미사일 개발및 수출을 자제하는 방안도 논의했다고 밝혔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바쁜 일정 중에도 평양의 한 유치원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유엔식량기구를 통한 미국의 지원상황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평양 어린이들과 춤을 춘 최초의 미국 국무장관입니다” 라고 농담을 한 그는 어린이들이 먹을 것이 없다는 두려움 속에 자라서는 안된다며, 국제구호 단체들은 지원물자가 필요한데 사용되도록 확실히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올브라이트 전 장관이 추진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과 미-북 관계 개선은 미국 내에서의 조심스런 반응과 보수적인 후임 정부의 등장 등으로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2001년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저술활동, 강연, 민간 기업 자문 등으로 여전히 바쁜 나날이었습니다. 마담 국무장관 회고록 Madam Secretary: A Memoir, Read My Pins:외교관의 보석함에서 나온 이야기 등은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를만큼 많은 관심을 끄는 저서들이었습니다.

2007년 올브라이트 여사는 자신의 국제적 전문성을 살려, 민간투자기업 Albright Capital Management를 창업했습니다. 고객들에게 새롭게 부상하는 지역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를 유도하는 회사였습니다.

또한 국제전략 기업인 올브라이트 스톤브릿지 그룹의 공동 의장으로도 일했습니다.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 재판소 자문 기구의 의장도 역임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여사는 외교, 민주주의, 세계문제 등에 기여한 공로로 여러 대학으로부터 많은 명예 학위를 받았습니다. 2012년 바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에게 대통령 자유메달을 수여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여사는 그 같은 활동 이력에도 불구하고 오직 일만 알고 놀줄 모르는 여성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화술이 좋은데다 특히 뛰어난 유머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여러가지 텔레비젼 코메디 쇼에도 등장해 인기를 끌었습니다.

올브라이트의 혈통은 유태인이었지만 가족은 일찍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습니다. 성당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던 올브라이트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영국교회, 즉 성공회 신자가 됐습니다. 올브라이트는 국무장관에 지명된 후에서야 그의 가계를 조사하던 언론에 의해 자신이 유태계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올브라이트 여사는 지난 3월 23일 워싱턴 디시 자택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84세였습니다. 각계 각층에서 그녀의 타계를 에도하는 가운데,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는 ‘어느때보다 어려운 이 시기에 올브라이트를 잃은 것은 전 세계의 큰 손실’이라고 애석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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