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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최초 흑인 여성 비행사, 베시 콜먼


[인물 아메리카] 미국 최초 흑인 여성 비행사, 베시 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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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흑인 여성 최초 항공기 조종사 베시 콜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매년 2월은 미국의 흑인 역사의 달입니다. 이 달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의 달이라 불리우기도 합니다. 아프리카계 시민들이 각분야에 걸쳐 이루어 놓은 업적과 역사에 끼친 공로를 기념하기 위한 기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중요한 역사적 기록을 남긴 인물을 한 사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흑인 여성 최초의 항공기 조종사 베시 콜먼입니다.

베시 콜먼은 용감한 베시, 여왕 베시 등으로 불리웠습니다. 그녀의 목표는 여성과 흑인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콜먼은 비행기 추락으로 일찍 사망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그녀의 유산은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베시 콜먼
베시 콜먼

베시 콜먼은 1892년 텍사스 주 애틀란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아프리카 계, 아버지는 흑인과 아메리카 인디언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었습니다. 베시의 남매는 모두 12명이나 됐고 집안은 가난했습니다. 어머니 수전 콜먼은 가정부로 일했고, 아버지 조지 콜먼은 소작농이었습니다.

베시가 9살이 됐을 때 아버지는 인종차별이 싫어 조상의 땅으로 간다며 오클라호마로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을 따라가지 않고 텍사스 주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베시는 어머니와 함께 목화 밭에서 일했습니다. 남의 집 빨래도 해주었습니다.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베시 콜먼은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신감은 매우 종교적이고 근면한 어머니한테서 배웠습니다.

베시는 학교를 다녔지만 6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오가야 했습니다. 약간의 돈이 모아지자 베시는 오클리호마 주에 있는 흑인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수업료를 계속 낼수 없어 불과 한 학기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23세살이 됐을 때 베시는 두 오빠들이 살고 있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로 갔습니다. 베시는 그곳에서 네일 아트, 즉 손톱 미용 등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늘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벳시는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오빠들로부터 프랑스에서는 여자들도 비행기 조종을 배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베시는 비행기 조종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베시는 비행기의 발명가 라이트 형제의 이야기도 읽고, 최초의 여성 조종사 해리엇 큄블리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베시는 마치 새 처럼 하늘을 나는 자신을 상상하며 조종술을 배워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비행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미국에는 흑인 학생을 받아주는 비행학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시는 유럽으로 가기로 하고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고되지만 좀더 돈을 받을 수 있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학비를 모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베시 콜만은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북부 지역에 있는 유명한 항공학교 에콜 다비아시용 데 프레레 카드롱 (Ecole d'Aviation des Freres Caudron)에 들어갔습니다. 콜만은 날개가 위 아래로 두개가 달린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7개월 동안 비행 교육을 받은 콜만은 1921년 프랑스의 국제항공연맹(Federation Aeronautique Internationale)으로부터 국제비행사 자격을 땄습니다. 국제 항공기 조종사 면허를 받은 세계 최초의 흑인 여성이 된 것입니다. 조종사가 된 콜먼은 시카고로 돌아왔습니다. 미국 언론, 특히 흑인 언론들은 베시 콜먼에게 큰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텍사스에서 발행되는 댈러스 익스프레스 신문은 그녀에게 어떻게 비행기 조종을 할 결심을 하게 됐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콜먼은 시대가 달라지면서 여성과 흑인도 항공기 조종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날아보지 않고는 진짜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콜먼은 곧 누구든지 조종사로 살아갈 만한 수입을 올리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콜먼은 먹고 살려면 조종 기술을 더 익혀야 하고 공중에서 더 교묘한 재주를 사람들에게 보여줄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시카고에는 비행 기술을 더 가르치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1922년 콜먼은 다시 유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 조종사들로부터 약 4개월 동안 곡예비행을 비롯한 더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콜먼은 뉴욕에서 처음으로 관중들에게 자신의 재주를 선보였습니다. 그녀의 에어쇼에는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콜먼은 비행기 몸체를 돌리면서 나르기도 하고 공중에서 엔진을 껐다가 착륙 직전에 다시 틀기도 했습니다. 관중들은 그의 재주에 큰 환호를 보냈습니다.

미국 내 다른 여러 도시에서 벌인 묘기때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베시 콜먼은 자신이 하늘을 나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 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콜먼은 미국에 흑인 항공학교를 세우는 것이 앞으로의 꿈이었습니다.

콜먼은 조종사가 된지 2년만에 로스 엔젤레스에서 에어 쇼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엔진이 멈추어버렸습니다. 비행기는 추락하고 콜먼은 다리가 부러지고 갈비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부상도 콜먼의 비행 의지를 꺾지 못했습니다.

콜먼은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시카고로 돌아가 항공학교 설립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고, 비행기도 없었습니다. 조그마한 사무실을 하나 열었지만 지속적인 재정 조달이 안돼 그나마 유지가 어려웠습니다. 콜먼은 다시 비행기를 타기로 결심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1925년 콜먼은 고향인 텍사스로 갔습니다. 과거에 목화를 따고 미용사 보조를 하던 여성이 이제는 세계 유일의 흑인 여성 조종사가 돼 돌아온 것입니다. 프랑스어도 구사하는 인텔리 여성이었습니다. 베시 콜먼은 교회, 극장, 흑인 학교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강연도 하고 자신의 비행 장면을 기록한 영화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비행기를 사기위한 어느 정도 돈이 모아졌습니다.

콜먼은 항공학교 설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지아, 플로리다 주 등에서도 에어쇼를 계속했습니다.

콜먼은 플로리다의 잭슨빌에서 큰 에어 쇼를 준비했습니다. 이 에어쇼는 콜먼을 스타로 만들어 줄수 있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탑승할 비행기는 바로 콜만 자신이 구입한 것이었습니다. 윌리암 윌스 라는 젊은 백인 조종사가 몰고 잭슨빌로 왔습니다. 그러나 중고 비행기인 JN-4 제니 호는 중도에 고장을 일으켜 두번이나 내려 수리를 해야 했습니다. 비행기를 수리한 다른 조종자들은 그런 비행기로 여기까지 왔다는게 놀랍다고 말했습니다.

1926년 4월 30일 에어 쇼의 날, 콜먼은 안전 벨트나 낙하산 등 아무런 장치도 하지 않은 채 비행기에 탔습니다. 그런 것들을 하고 있으면 아래를 넓게 내려다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윌스가 조종하는 비행기는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약 천 미터 고도로 솟아올랐을 때 갑자기 조종간이 움직질 않았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연장 하나가 엔진 사이에 끼어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비행기는 공중에서 거듭 회전을 했습니다. 당시의 비행기는 뚜껑이 없었기 때문에 콜먼을 붙잡아 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콜먼은 밖으로 튕겨져 나가 땅에 떨어지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34세였습니다. 조종하던 윌스는 안전벨트를 하고 있었지만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역시 사망했습니다.

에어 쇼를 지켜보던 수천명의 관중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전문가들은 그 비행기가 너무 낡았고 안전한 기종이 못됐다고 진단했습니다.

콜먼의 일생은 짧았지만 그것은 흑인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는 생애였습니다. 콜먼에게는 오직 하늘만이 자유로운 곳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다른 흑인들에게 넓은 세계를 향한 문을 열어주려 했습니다.

그러한 소망이 이루어 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미국의 민간 항공학교에서 흑인 학생을 받아들인 것은 1939년에 가서야 실현됐습니다.

흑인 조종사들이 전투에 참여한 것도 2차 세계대전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흑인 여성이 처음으로 군 조종사가 된 것도 1980년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1931년 시카고 조종사 협회는 매년 콜먼의 묘지 상공을 추모 비행하는 연례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1977년 미국 여성조종사협회는 베시 콜먼 항공 클럽을 결성했습니다. 1995년 미 우정국은 콜먼 기념 우표를 발행하고 그녀가 이룩한 성과를 되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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