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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여성 최초 노벨 평화상' 제인 애덤스


[인물 아메리카] '미국 여성 최초 노벨 평화상' 제인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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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문화, 다양한 인종이 함께 모여사는 미국,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미국인물 열전 시간입니다. 이은경입니다. 오늘은 미국의 사회개혁가이자 평화운동가이며 미국 여성 최초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제인 애덤스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양한 문화, 다양한 인종이 함께 모여사는 미국,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미국인물 열전 시간입니다. 이은경입니다. 오늘은 미국의 사회개혁가이자 평화운동가이며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제인 애덤스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본명, 로라 제인 애덤스는20세기 초반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미국 사회사업의 개척자였습니다. 그는 북미주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헐 하우스의 창설자였습니다. 또한 학자이고 작가였으며, 여성과 이민자 등 약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고, 세계 평화를 주창한 여성이었습니다. 제인 애덤스는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습니다.

제인 애덤스는 1860년 미국 중부지방인 일리노이 주 씨더빌에서 9남매중 8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존 애덤스, 어머니는 새라 웨버였습니다. 아버지는 제분소를 운영하는 부호였으며, 16년 동안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을 지낸 지방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남북 전쟁 때는 북군에 들어가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그는 에이브라햄 링컨 대통령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제인 애덤스는 1881년 일리노이 주에 있는 락포드 여성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7명의 졸업생 중 수석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유산을 남기고 아버지가 타계하자 제인 애덤스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여자의과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몸이 약하고 자주 병을 앓아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제인 애덤스는 의사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1883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제인 애덤스는 그곳에서 영어와 글 쓰기를 연마하는 한편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27살이 되던 해 애덤스는 락포드 여성신학교에서 만난 친구 엘렌 스타와(Ellen Starr)와 함께 두번째 유럽 여행을 갔습니다.

제인 애덤스는 영국에서 음식을 얻기 위해 길게 줄 서있는 빈민들의 행렬을 보았습니다. 또한 주민정착사업인 토인비 홀(Toynbee Hall)을 볼 기회도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실험적으로 시행되는 런던의 이스트 엔드(East End)에 있는 사회복지 기관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공장지대였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었습니다. 애덤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영국인의 의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애덤스는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은 미국 대도시 시카고에도 그같은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시카고는 애덤스의 고향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입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애덤스는 1889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친구와 함께 비어있던 시카고의 대 저택을 임대했습니다. 이 건물은 찰스 헐 이라는 사람이 지은 건물로, 건물 이름도 헐 하우스라 불리웠습니다.

두 친구는 이 건물로 이사를 하고 공장지대 빈곤층 주민들을 위한 자선사업과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시민의 거의 80%가 이미자들인 도시 빈민가에 커뮤니티 센터가 등장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아침에는 유치원을 운영하고 오후에는 초등생 또래의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저녁에는 어른들을 위한 클럽을 운영하거나 대학수준의 다양한 학과과정을 제공했습니다. 사실상의 야간학교였습니다. 동시에 이곳 저곳을 돌며 지역 주민들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자주 연설회를 갖고 기부금을 모았습니다.

부유층 가정의 젊은이들에게는 어린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고 아픈 아이들을 도와주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애로사항을 상담해 주도록 요청했습니다. 헐 하우스가 문을 열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을 받았습니다. 두번째 해에는 매주 약 2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로 헐 하우스는 인기가 높았습니다.

헐 하우스는 늘어나는 수강생들을 돕기 위해 서비스와 시설을 늘려나갔습니다. 처음으로 증설된 시설은 미술관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탁아소, 공동 주방, 커피 하우스, 체육관, 수영장이 차례로 들어섰습니다. 여학생들을 위한 기숙 시설도 마련되고, 책을 제본하는 곳, 미술실, 음악학교, 연극반, 순회도서관, 취업 지원실, 노동자 박물관도 마련됐습니다.

헐 하우스는 13채의 건물과 운동장 1개, 위스콘신 주 제네바 호 근처의 야영지까지 세워질 만큼 커졌습니다. 또 젊은이들이 사회사업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의 저명한 사회사업가와 사회개혁가들이 이곳을 거쳐갔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예술인들이 이곳에서 여러 가지 사회복지 활동을 벌였습니다.

헐 하우스는 미국의 국가적 복지기구의 롤 모델이 됐습니다. 애덤스는 사회복지 전문가로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명성이 알려지면서 애덤스는 점차 보다 폭 넓은 책임을 맡게 됐습니다. 1905년 애담스는 시카고 교육국과 학교 관리위원회의 의장을 맡았습니다. 1908년에는 시카고의 ‘시민과 자선 학교’의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자선과 교정을 위한 전국 회의’의 첫 여성 회장이 됐습니다.

애덤스는 노동단체, 개혁단체들과 함께 최초의 소년심리원법과 공동주택법, 여성노동자의 1일 8시간 노동제, 공장 검열, 노동자의 보수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또 이민자와 흑인에 대한 사법제도의 정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1909년 전국 유색인종연합회가 창설될때 애덤스는 간부위원으로 활약했습니다. 애덤스는 강력한 여성의 참정권 주창자였습니다.

조산원, 마약사용, 우유공급, 위생 문제, 쓰레기 처리장 등의 조사관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시민의 생활에 관련되는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적극적으로 활동한 점을 높이 평가한 명문 예일 대학교는 애덤스에게 여성 최초의 명예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한때 미국 언론은 애덤스를 미국의 유일한 성녀라고 표현했습니다.

제인 애덤스는 1910년, 전국 사회사업가 회의에서 최초의 여성 의장이 됐습니다. 1912년에는 진보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전당대회에서 처음으로 후보지명연설을 한 여성이 됐습니다. 1915년 애덤스는 미국 여성 평화당 의장에 추대됐습니다. 애덤스는 미국 시민자유연맹, America Civil Liberty’s Union 설립자이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 여성회의는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 국제연맹'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애덤스를 회장으로 선출했습니다. 애덤스는 1929년까지 조직의 국제회의를 주재했고, 물러난 후에도 평생 명예회장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제인 애덤스는 평화주의자였습니다. 당연히 제 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이 때문에 애덤스는 언론으로부터 맹 비난을 받았습니다. 미국혁명의 딸들이라는 단체로부터는 제명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참극과 대공황 등이 발생하면서 제인 애덤스의 평화론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기 시작했습니다. 애덤스는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재직하면서 적국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구호활동도 전개했습니다. 국경을 초월한 그같은 노력으로 제인 애덤스는 193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같은 해 그와 함께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니콜라스 머레이 버틀러도 세계 평화의 주창자였습니다.

애덤스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유산을 들여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후로 많은 사람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통해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특별히 일생동안 함께한 파트너와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대학생때 만나 헐 하우스를 같이 시작한 엘렌스타는 평생을 같이 한 동지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매리 로젯 스미스는 애덤스와 같은 집을 사용하면서 일을 도왔습니다.

제인 애덤스는 미개척 분야인 사회사업, 사회복지의 개념을 정착시키고 그 표본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아가 사회사업을 사회학과 접목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애덤스는 살아있는 동안 여론조사에서 ‘미국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여성,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일리노이 주립대학 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 는 사회사업대학원을 Jane Addams College of Social Work 로 명명했습니다.

제인 애덤스는 1926년 심장마비로 앓아누웠습니다. 불행히도 그후로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1931년 12월 10일,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는 바로 그날 제인 애덤스는 볼티모어에 있는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그리고 1935년 7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그의 평생 활동 근거지인 헐 하우스 정원에서 거행됐습니다. 장례식에는 수천명이 줄을 지어 그녀에게 조의를 표했습니다.

1963년 일리노이대학교 시카고 캠퍼스의 설립으로 헐 하우스 협회의 건물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됐습니다. 하지만 헐 하우스 본관은 제인 애덤스 기념관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양한 문화, 다양한 인종이 함께 모여사는 미국,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미국인물 열전 오늘은 미국의 사회개혁가이자 평화운동가이며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제인 애덤스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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