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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보수 정치 거목' 밥 돌


[인물 아메리카] '보수 정치 거목' 밥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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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연방 상·하원에서 도합 35년을 재임했고, 오랫동안 상원 공화당 대표를 지낸 캔자스 출신 ‘보수 정치 거목’ 밥 돌 전 의원의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노시창입니다.

미국 연방 상·하원에서 도합 35년을 재임했고, 오랫 동안 상원 공화당 대표를 지낸 캔자스 출신 ‘정치 거목’ 밥 돌 전 의원이 2021년 12월 5일 98세로 워싱턴 자택에서 타계했습니다. 돌 전 의원은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중이었습니다.

밥 돌 전 미 연방 상원의원
밥 돌 전 미 연방 상원의원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의 각계 각층에서는 일제히 애도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밥돌 의원을 민주주의의 영웅이라 부르고, ‘그와 나는 여러가지 사안에서 서로 달랐지만 근본적인 것에서는 여전히 함께 해결책을 찾았고 서로를 존중했다’며,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언론들도 그를 용감한 전사이자 뛰어난 정치인이었다며 일제히 추모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는 오랜 의정활동을 통해 민권 증진, 사회보장 강화, 장애자 복지, 여성 권리 향상, 국내와 국제 사회의 빈곤 퇴치, 독재 정권의 해소 등 미국은 물론 지구촌 수 십억 인구의 삶에 영향을 주는 폭 넓은 정치를 폈습니다.

밥 돌 의원은 1961년부터 8년 동안 하원의원으로, 1969년부터는 27년 동안 상원의원으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1985년부터 1996년까지 11년 동안을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로 활약했습니다. 밥 돌은 여러 차례 대선에 도전했으나, 백악관 입성에는 실패했습니다.

밥 돌은 1923년 7월 22일 미국 중부 캔자스 주 러셀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도란 레이 돌과 어머니 바이나 탈보트 사이에서 난 4남매 중 2남이었습니다. 정식 이름은 로버트 조셉 돌이었습니다.

밥 돌은 1941년 300 달라의 은행융자를 받아 캔자스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혼자서 학비를 조달하며 공부를 하는 중에도 학교의 미식 축구, 농구, 육상 선수로도 활약했습니다.

그해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자, 돌은 학교를 중단하고 육군에 들어갔습니다. 장교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된 그는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가 속한 사단에는 볼로냐 북부 산악에 진을 친 독일 군을 물리치라는 임무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1945년 3월과 4월 두 차례 적군과 교전 중 부상을 입었습니다. 특히 4월 14일 아침 돌 소위가 속한 부대는 지뢰가 잔뜩 매설된 가파른 고지를 올라갔습니다. 돌은 전진 중 목숨을 잃은 무전병 시신을 수습하고 소대원들을 방어하던 중 독일군의 사격을 받았습니다. 돌 소위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오른팔은 찢겨나갔고, 팔과 몸을 연결해주는 쇄골도 깨졌습니다. 목 아래 전신은 마비됐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기 3주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피스톨라에 있는 야전병원으로 후송될때까지 쓰러진 자리에서 10시간이나 버티며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돌은 그후 39개월 동안을 호전과 악화가 거듭되는 수술과 재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돌은 굳은 의지와 유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회복됐지만 오른 팔은 쓸 수 없게 됐습니다. 밥 돌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된 사람들은 기금을 모아 치료비를 보태주었습니다. 특히 고향 러셀 사람들이 보여준 지원을 돌 의원은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두 차례 퍼플 하트 훈장이 수여됐습니다.

고향 캔자스로 돌아온 밥 돌은 1948년 자신의 물리치료사인 필리스 홀든과 결혼했습니다. 그 후 군 복무자에게 주어지는 학비융자를 받아 아리조나 대학과 캔자스 주 토피카의 와쉬번 대학에서 역사와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밥돌은 1950년 아직도 학생 신분일때 주 하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이어 변호사, 지방 판사를 거쳐 1960년에는 처음으로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하원에서의 8년 동안 그는 강력한 보수적 예산안, 민권과 선거권 확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연방 공휴일로 제정하는 등 당을 초월한 의정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68년 밥 돌은 캔자스 주를 대표하는 연방상원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돌 의원은 이때부터 리처드 닉슨의 강력한 정치적 지원군이 됐습니다. 돌 의원은 그러나 독립적이었습니다. 밥 돌 의원은, 레건 대통령, 조지 H.W. 부시 대통령, 클린턴 대통령 재임 중 의회의 공화당 원내 총무를 지냈습니다.

밥 돌 의원은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 재임시 상원의 강력한 금융위원장을 맡으면서 세금과 지출삭감법을 입안하고 통과시켰습니다. 당시 미국의 세율은 최고 70%까지 달했으나, 그의 임기 종료 때에는 28%로 줄어들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미국 경제는 80년대까지 이어지는 고도 성장을 기록할수 있었습니다.

농장과 목장의 챔피언으로도 알려진 밥 돌 의원은 의회에서 총 27년을 농업위원장을 지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돌의원은 미국 농업과 세계의 빈곤 퇴치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2008년 돌 의원이 세계 식량상을 받은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밥 돌 의원은, 언제나 강력한 장애인 권리 주창자였습니다. 돌 의원의 장애인 보호 강화는 그의 첫 상원연설에서도 주제가 될 만큼 그에게는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1990년 그가 입법한 장애인 법은 수 백만 미국 장애인들이 공공 시설에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했고, 고용 기회, 의료혜택 등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타협이 변절자로 비난을 받는 세상에서도 대국적 견지에서 필요하다면 타협했습니다.

첫 부인과 이혼했던 돌 의원은 1975년 연방통상위원회 관리 엘리자베스 핸포드와 재혼했습니다. 1976년 재선에 나선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밥 돌 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포드-돌 팀은 지미 카터-월터 먼데일 팀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습니다. 1980년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당시의 H.W.부시 부통령에 패했습니다. 두 사람은 경선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나 늘 강력한 정치 동반자로 또 친구로서의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나중에 그를 가리켜, ‘돌은 과거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공화당의 지도자였다’고 치하했습니다.

1996년 그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다음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와 대결했습니다. 돌 후보는 근면, 성실, 책임감이라는 공통의 유산으로 우리는 뭉쳤다고 선언하며 대선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돌 후보는 이번에도 백악관 입성에 실패했습니다. 빌 클린턴은 대통령에 취임한지 얼마 안돼 경쟁 상대이던 밥 돌에게 국가를 위한 헌신으로 미국민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 자유 메달을 수여했습니다.

2018년 돌 의원은 의회가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의회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의회는 밥 돌이 ‘일생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며, 지도력과 결단이라는 미국의 정신을 구현하고, 정치 안에서나 밖에서나, 가장 다방면의 롤 모델로 존재해왔다’고 그를 찬양했습니다.

1996년 대선이 끝난 후 캔자스 대학은 돌 정책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돌 의원은, 대학측의 연구소 설립 제안을 수락하면서 자신을 찬양하는 개인 기념물은 설치하지 못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말년에 이르러 그에게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역할은 워싱턴 중심지에 들어선 2차대전 기념비 조성 사업을 지휘하는 임무였습니다. 기념비 건설위원장을 맡은 밥돌은 기업계 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로부터 총 1억 8천 5백여만 달러의 후원을 유도해 설계, 건설, 관리를 위한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기념비 준공식에 참석한 밥 돌 위원장은 위대한 이 나라의 일을 맡아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커다란 영광이라며 흐뭇해했습니다.

90세와 91세의 고령일 때도 그는 11차례나 고향이자 선거구인 캔자스 주를 찾았습니다. 밥돌은 오랫동안 자신을 지원해준 고향 러셀을 포함해 105개 카운티를 모두 돌며 주민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평생을 국가를 위해 봉사한 밥 돌이 사망한 뒤 그의 시신은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조문을 받았습니다. 이어 내셔널 대성당에서의 장례 미사, 그리고 고향 캔자스 주로 가 마지막 작별을 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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