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문화, 다양한 인종이 함께 모여사는 미국,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이 시간에는 11월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영국인들이 오늘날의 버지니아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포카혼타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포카혼타스는 1595년 인디언 포와탄 족 추장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포와탄 족은 당시 버지니아 주 일대의 인디언 부족 20개 이상을 통치하는 막강한 부족이었습니다. 포와탄은 이들이 사는 지역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1607년 영국에 있는 버지니아 회사는 사람들을 모아 오늘날의 미국 땅에 정착시키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신대륙에 도착한 영국인들의 지도자는 죤 래트클리프였습니다. 래드클리프는 새로운 땅을 개척해 영국 제임스 왕의 영토로 삼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도착한 지역 이름도 제임스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제임스타운이라고 붙였습니다.
처음 제임스타운에 도착한 영국인들은 이미 그곳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천년 이상을 살아온 포와탄 족이 있었습니다.
포와탄은 알공킨 어를 사용하는 많은 부족의 하나였습니다. 당시 약 12살 정도인 포카혼타스는 영국인들이 도착한 이후 종종 그들이 사는 곳을 가보았습니다. 영국인들도 차츰 포카혼타스를 알게 됐고, 그는 자연스럽게 영국인과 포와탄 사이의 중요한 소통창구가 됐습니다.
인디언 문화는 영국 문화와 너무 달랐습니다. 양측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간에 오해와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영국인 정착민 중에는 탐험가이자 군인이고, 작가이기도 한 존 스미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1607년 포와탄 전사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스미스는 1624년 출판한 책에서 자신이 살해 당할번 했으나 포카혼타스가 그를 구해줬다고 기록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수백년 동안 거듭 나돌았습니다. 포카혼타스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바로 이 이야기에서부터였습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러나 포카혼타스가 존 스미스를 구해준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스미스가 미국 남부 훌로리다에서 일어난 비슷한 이야기를 읽고 만들어 낸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훌로리다 사건이란 스페인 탐험가와 한 인디어 추장, 그리고 추장의 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또 어떤 역사가들은 존 스미스가 위험에 처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스미스가 쓴 것처럼, 처형이 아니라, 인디언 부족의 의식, 즉 스미스를 자기 부족 사람으로 인정하는 포와탄의 의식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또 인디언 추장은 영국 정착민들을 자기 편으로 삼고 싶어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미스가 체포된 다음 인디언과 식민지인들은 휴전에 합의했습니다. 그 뒤 포카혼타스는 제임스타운을 더 자주 방문했습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포카혼타스가 존 스미스를 살려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식민지인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때는 정착민들에게 인디언들의 기습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존 스미스는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시기 양측 사이에 또 불화가 일었습니다. 1611년 새 식민지 총독으로 부임한 토마스 데일은 인디언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2년 후 영국 군인 사무엘 아갈이 포카혼타스를 납치했습니다. 그때 포카혼타스는 18살 쯤이었습니다. 정착민들은 인디언의 공격을 막기위해 그녀를 납치한 것입니다. 이들은 또 포와탄 추장에게 새로운 평화 협정을 맺자고 강요했습니다.
포카혼타스는 제임스타운 정착지에서 1년 넘게 인질생활을 했습니다. 그동안 정착민 중 한사람인 존 롤프가 그녀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기독교 신앙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포카혼타스는 아메리카 인디언 중 최초의 기독교도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레베카(Rebecca)로 바꾸었습니다.
1614년 포카혼타스는 제임스타운 교회에서 존 롤프와 결혼했습니다. 포카혼타스는 백인과 결혼한 최초의 아메리카 인디언이었습니다. 남편 존은 자기들의 결혼이 식민지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카혼타스와 결혼했다”고 말했습니다.
데일 총독은 포와탄 부족과 협상을 벌여 약 8년 동안 양측 사이에 평화가 유지됐습니다. 포카혼타스의 남편은 담배 농사를 지었습니다. 포카혼타스는 남편에게 인디언식 담배농사법을 가르쳤고, 그 방법으로 수확이 늘었습니다. 담배는 정착민들이 처음으로 생산해낸 성공적인 농작물이 됐습니다.
1615년 포카혼타스는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토마스란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 다음해 포카혼타스 가족은 영국으로 갔습니다.
포카혼타스는 영국 런던에서 유명 인사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영국왕 제임스 1세를 알현했습니다. 런던에서는 존 스미스도 다시 만났습니다.
식민지에 정착민을 이주시킨 버지니아 회사는 포카혼타스의 방문이, 신대륙에서 영국인과 인디언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영국인들에게 버지니아 식민지로 가자고 촉구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어떤 화가가 포카혼타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었습니다. 그림 속의 포카혼타스는 왕을 만나러 가기 위해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 옷은 1600년대 영국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이었습니다. 그 초상화는 포카혼타스의 진짜 모습이 그려진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포카혼타스 가족은 영국에 7개월간 머물렀습니다. 이들은 다시 제임스타운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포카혼타스가 천연두에 걸렸습니다. 결국 포카혼타스는 영국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나이 불과 22세로 숨진 포카혼타스는 그레이브센드에 묻혔습니다.
그의 아들 토마스 롤프는 영국에서 자랐습니다. 스무살이 되자 그는 버지니아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살던 고향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토마스는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습니다. 토마스 롤프를 통해 버지니아 주에 많은 포카혼타스 후손들이 번졌습니다. 후손들은 지금도 포카혼타스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카혼타스를 버지니아의 First Lady, 즉 영부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포카혼타스는 자신의 기록을 남겨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녀에 관한 당시의 유일한 기록은 존 스미스가 쓴 것 뿐입니다. 그러나 스미스의 기록이 모두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스미스를 구해줬다는 이야기는 인기있는 전설이 됐습니다.
미국인들은 포카혼타스가 버지니아의 초기 영국인 정착때 용감하고 우호적인 태도로 이들에게 도움을 준 사실을 매우 소중한 역사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 포카혼타스가 토착 원주민을 대표해 인디언과 백인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곳 워싱턴 디시에 있는 연방 국회의사당 중앙 홀에는 포카혼타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대형 그림 3점이 걸려 있습니다. 하나는 포카혼타스가 기독교 신앙인이 되는 의식을 거행하는 정면이고 다른 두 점은 그녀가 존 스미스를 구해주는 장면들입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제외하면 의사당 내에 포카혼타스의 그림이 가장 많습니다.
미국의 여러 작가들도 포카혼타스에 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월트 디즈니 사는 포카혼타스의 이야기를 인기있는 어린이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남북 전쟁 때에는 북군이든 남군이든 그녀의 이름이나 그림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부대가 많았습니다.
미국의 여러 기관과 단체들은 그녀의 이름을 기관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그녀의 그림을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에는 1600년대 영국인 정착촌을 그대로 재현시켜 놓고 있으며, 연간 50만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