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열린 암호화폐 컨퍼런스에 참석한 혐의로 체포된 미국인 버질 그리피스 씨가 전격적으로 유죄를 인정했습니다. 이에 앞서 검찰은 그리피스 씨가 한국 서울시의 도움을 받아 한국과 북한에서 관련 사업을 추진하려던 정황이 담긴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함지하 기자가 보도합니다.
버질 그리피스 씨가 27일 자신의 혐의를 전격 인정했습니다.
미국 뉴욕남부 연방검찰은 보도자료를 통해 그리피스 씨가 이날 법원에 출석해 자신에게 적용된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 위반 공모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2019년 4월 북한 평양에서 열린 가상화폐 컨퍼런스에 참석했던 그리피스 씨는 같은 해 11월 미 수사당국에 체포됐으며, 이후 변호인을 선임해 법적 공방을 벌여왔습니다.
그리피스 씨가 유죄를 인정한 이날은 첫 재판이 열리는 날로, 재판부는 이번 유죄 인정에 따라 재판을 마무리한다고 밝히고, 내년 1월18일을 최종 선고 공판일로 발표했습니다.
다만 지난 7월 자신의 가상화폐 계좌에 접근한 사실이 적발돼 재구금됐던 그리피스 씨는 최종 선고 공판일까지 계속 구금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재판부는 명령했습니다.
국제긴급경제권한법 위반 공모 혐의는 최대 20년의 구금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뉴욕남부 연방검찰은 이날 보도자료에서 그리피스 씨가 미국의 가장 위험한 적국 중 하나인 북한을 도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면서, “그리피스 씨는 북한의 기만적인 정권이 가하는 위협에 대해 최대 압박을 가한 의회와 미국 대통령의 제재를 훼손함으로써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암호화폐인 이더리움의 개발자인 그리피스 씨는 지난 2018년부터 북한에 암호화폐 구축망인 ‘이더리움 노드’를 만드는 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특히 국무부로부터 컨퍼런스 참석을 위한 방북 승인을 받지 못하자 무단으로 평양을 방문해 암호화폐가 북한의 제재를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문건에 따르면 그리피스 씨는 컨퍼런스 연설을 통해, 암호화폐 기반인 블록체인 기술이 “은행 업무와 거래에서 자립을 허용한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설명한 뒤, 미국은 블록체인을 통한 금전 지불을 막을 수 없고 유엔은 거래를 막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대북제재 전문가인 조슈아 스탠튼 변호사는 27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리피스 씨의 유죄 인정이 일반적인 형사사건보다 매우 늦게 이뤄진 점에 주목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선 위법 행위가 명확히 드러난 피고가 검찰과의 유죄 인정 합의를 통해 재판 이전에 형량을 줄이는 경우가 많지만 그리피스 씨의 유죄 합의는 기소 약 1년10개월 만인 이날 이뤄졌습니다.
[녹취: 스탠튼 변호사] “Griffiths is obviously a person who has very strong political views that regardless of the law. ‘It's a good thing for him to help North Korea violate international sanctions,’ he thinks that this is was the right thing for him to do for whatever reason.”
스탠튼 변호사는 “그리피스 씨는 법에 상관 없이 강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인물”이라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북한을 돕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습니다.
검찰 출신인 정홍균 변호사는 그리피스 씨가 유죄 인정을 했지만 최종 선고가 이뤄지는 내년 1월까지 법적 공방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정홍균 변호사] “판사는 양측에서 제출한 선고 제안서를 각각 검토하고 1월18일 선고 당일 날 검찰 측과 피고 측의 질문 사항을 물어본 다음에 최종적으로 형량을 선고하게 됩니다.”
정 변호사는 상황에 따라 최대 형량인 20년보다 줄어들 수 있지만, 20년 형이 내려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리피스 씨의 변호인은 이날 유죄 인정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검찰 측과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검찰은 26일 변호인 측이 신청한 증인의 화상 방식 참석에 반대하는 서한을 제출하면서 그리피스 씨가 회사 직원 등과 주고받은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 서비스 ‘텔레그램’ 내용을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그리피스 씨 등이 북한에 ‘이더리움 노드’를 구축하는 문제와 관련해 한국 서울시의 도움을 받으려 한 정황이 담겨 눈길을 끌었습니다.
검찰이 제출한 이 자료에 따르면 그리피스 씨는 2018년 8월17일 텔레그램 메시지로 이더리움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서울시장’을 언급한 뒤 “그는 이전에 북한에 노드를 도달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같은 날 보낸 또 다른 메시지에선 “한국이 스스로 북한에 연결 서비스를 제공하길 원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그들의 일”이라며 “만약 그들이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물어본다면 심지어 긍정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그리피스 씨는 24일 보낸 메시지에선 “한국은 그런 제재를 위반하는 게 허용되는 것 같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밖에 그리피스 씨는 이메일을 통해서도 당시 서울에 ‘이더리움 연구센터’ 구축 문제와 함께 북한에서의 이더리움 관련 기관 설립을 논의했는데 여기에도 서울시 정부와 협의를 한 사실 등이 명시돼 있습니다.
또 이더리움 관계자로 보이는 인물은 2018년 6월29일 그리피스 씨에게 당시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리는 암호화폐 관련 행사를 언급하면서, 서울시장과 성남시장, 한국 연예기획사인 ‘SM 엔터테인먼트’ 회장, 국회의원 등이 연사로 나선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서울시와 협의 사실을 확인하고 “대화 중에 (서울의) 이더리움 연구센터에 대한 지원과 북한에 연구시설을 설치하는 문제가 언급됐다”면서 “100% 확정된 제안은 아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상황을 종합하면 그리피스 씨 등은 한국과 북한에서 암호화폐 관련 사업을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서울시장과 서울시 정부 등의 도움을 받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피스 씨의 이 같은 교신 내용들은 검찰이 이더리움 관계자의 증인 채택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공개됐습니다.
검찰은 그리피스 씨가 해당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제재 위반을 염려하는 회사 관계자들에게 자신이 북한과의 사업 추진에 관심이 없다는 등의 입장을 표명했다며, 이는 결과적으로 사실과 달랐기 때문에 해당 메시지 수신자가 증인으로 채택돼선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VOA 뉴스 함지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