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노예 해방은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얻어졌습니다. 노예를 속박에서 풀어내기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들 가운데는 지하철도의 차장이라 불리우는 한 여성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비밀 조직망을 통해 수많은 노예들을 탈출시킨 해리엇 터브먼 (Harriet Tubman) 입니다.
해리엇 터브먼은 워싱턴 DC와 인접한 메릴랜드 주에서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해리엇은 목숨을 걸고 대농장에서 일하는 수백명의 노예와 그 가족들을 비밀 연결망을 통해 북부 지역 자유로운 곳으로 탈출시켰습니다. 그 연결망은 지하철도, 노예를 인도한 해리엇은 차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습니다.
해리엇의 출생일이 언제인지는 알수 없습니다. 다만 1820년에서 1825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입니다. 해리엇은 메릴랜드 주 도체스터 카운티에 있는 노예 가정에서 9 남매 중 한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해리엇 릿 그린 (Harriet “Rit” Green)은 부엌 노예였고 아버지 벤 로스(Ben Ross)는 목재소 노예였습니다.
본래 이름이 아라민타(Araminta)였던 해리엇은 결혼 무렵 어머니의 이름을 따 해리엇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노예들은 많은 폭력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해리엇과 그의 가족에게도 신체적인 폭력은 일과 처럼 반복됐습니다. 해리엇은 5살때 다른 곳에 아이를 봐주도록 잠시 보내졌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울자 그집 주인은 해리엇을 채찍으로 연달아 쳐, 심한 상처를 입혔고 그녀는 일생 동안 흉터를 안고 살았습니다.
십대 시절 어느날 해리엇은 식료품 상점에 물건을 전달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농장을 빠져나온 한 노예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 노예의 감시원은 해리엇이 탈출을 부추겼다며 2 파운드짜리 물건을 그녀의 머리에 집어 던졌습니다. 해리엇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가해자는 많은 피를 흘리며 혼수상태에 빠진 해리엇을 침대도 없는 방으로 데리고 가 꼬박 이틀을 베틀에 앉혀두었습니다. 해리엇은 그 사건 이후 일생 동안 극심한 두통과 혼수상태에 빠지는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1844년 해리엇은 존 터브먼(John Tubman)이라는 자유인과 결혼했습니다. 당시 메릴랜드 주 동부 해안 지대에는 흑인의 약 절반 정도가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족 중에 자유인과 노예가 섞여 있는 일이 드문일이 아니었습니다.
해리엇의 아이들도 노예가 됐습니다. 해리엇은 심한 질병을 앓고, 몸이 허약해져 값이 나가지 않는 노예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가족들은 더욱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해리엇은 메릴랜드 북쪽 자유 지역인 펜실배니아 주로 탈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해리엇은 남편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는 제의를 거부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1849년 해리엇은 남동생 벤과 해리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지역 신문에 이들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300달러의 상금을 준다는 공고가 실리자 동생들은 겁을 먹고 농장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해리엇은 혼자서 메릴랜드를 벗어나 펜실배니아로 향했습니다.
해리엇은 약 145 Km에 달하는 은밀한 길을 걸어 주 경계선을 넘었습니다. 펜실배니아 주의 대도시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해리엇은 그곳에서 가정부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해리엇은 안전한 땅에 그냥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1850년 12월, 해리엇은 메릴랜드에 있는 조카의 가족이 경매장에서 팔려갈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해리엇은 서둘러 메릴랜드로 가 조카의 전 가족을 데려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지하철도를 이용해 노예를 탈출시킨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그 후 해리엇은 한 번에 한 그룹씩, 노예들을 메릴랜드 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자유를 찾아 주었습니다.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도 데리고 나왔습니다. 탈출자들은 은밀하게 밤에만 움직였습니다. 보통 걸어서 최소 5일에서 최대 3주까지 걸리는 위험하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탈출 작업이었지만, 노예들을 돕는 자가 왜소한 흑인 여성 해리엇인 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노예들이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잘 짜여진 조직망 속에는 자유 흑인, 백인 노예 폐지론자, 그리고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서로 연결돼 있었습니다.
1850년 미국에서는 탈출노예법이 제정됐습니다. 북쪽으로 탈출한 노예나 자유 흑인을 붇잡아서 다시 노예로 삼도록 하는 법이었습니다. 해리엇의 탈출 작업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제는 노예를 메릴랜드 북쪽이 아니라 더 멀리 캐나다까지 보내야 했습니다. 밤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탈출 시기도 밤이 긴 봄과 가을을 택했습니다.
1850년에서 1860년 사이 10년 동안 해리엇은 19차례 남북을 왕래하며 300명에 달하는 노예들을 탈출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로 해리엇은 모세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300명이라는 숫자가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가 직접 인솔해 자유를 찾아준 노예만도, 연로한 자신의 부모를 포함해 최소한 70명에 달했으니 결코 그 숫자가 적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노예들에게는 어떤 경로로 탈출을 하라고 지침을 주었습니다. 해리엇은 자신의 기차가 한번도 탈선한 적이 없으며, 단 한명의 승객도 잃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남북전쟁이 벌어지자 해리엇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북군을 위해 여러가지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군 부대에서 요리사와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해리엇은 약초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병든 북군 병사들과 탈출 노예들을 도왔습니다.
해리엇은 또 첩보조직을 만들어 남군의 이동과 보급로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수집해 북군 지휘관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해방된 노예들로 북군 흑인 부대를 창설하는데도 기여했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해리엇은 뉴욕주 오번(Auburn)에 조그만 대지를 구입해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노예출신으로 북군에서 복무한 넬슨 데이비스(Nelson Davis)와 결혼했습니다.
해리엇은 빈곤에 허덕이는 과거의 노예와 고령자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해리엇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와주는데 앞장섰습니다. 집에서 채소와 돼지를 기르고 지인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자선사업을 전개했습니다. 해리엇은 여성 참정권 운동 지도자인 수전 앤서니(Susan Anthony)여사와 함께 일을 하고 미국 북동부 지역을 순회하며 여권운동도 벌였습니다.
1896년 해리엇은 자기 집 옆에 땅을 사 연로한 노예출신 흑인들을 위한 요양시설 해리엇 터브먼 홈(Harriet Tubman Home)을 지었습니다. 해리엇은 어렸을 때 다친 머리 때문에 늘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이 고통을 면하기 위해 뇌 수술까지 받았지만 건강은 계속 악화됐습니다. 해리엇은 1911년 자신의 이름을 딴 요양원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1913년 3월 10일, 해리엇 터브먼은 결국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1822년 출생이 맞다면 91세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살아 생전 널리 존경을 받았던 해리엇 터부먼은 사후에도 많은 사람들의 우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여러 학교와 박물관등이 등장했고, 많은 책과, 영화, 다큐멘터리 등이 나와 그의 행적과 정신을 되새겨주고 있습니다.
2016년 미국 재무부는 20달러 짜리 지폐에 해리엇 터브먼의 얼굴을 기존의 앤드루 잭슨 대통령 얼굴에 추가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2021년 1월 조 바이든 행정부는 그동안 지연됐던 새 지폐 디자인을 서두를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