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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노예후손 교육에 헌신한 흑인 지도자, 부커 워싱턴


[인물 아메리카] 노예후손 교육에 헌신한 흑인 지도자, 부커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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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 워싱턴은 노예제도가 폐지됐으나 여전히 차별과 가난이 지배하던 1800년대 중반, 흑인 사회의 교육과 경제력 향상을 위해 일생을 바친 지도자였습니다. 워싱턴은 노예로 태어난 흑인의 마지막 세대 인물로, 구 노예와 그 후손들의 목소리를 강력히 대변했습니다.

남부 여러 주의 흑인들은 노예해방이 선언됐어도 민권과 경제활동 등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워싱턴은 앨라바마 주 터스키기에 전통적으로 흑인 중심인 Tuskegee Institute의 학장으로써 지도자를 양성하는 한편 흑인 기업연맹을 조직해 경제력 향상에 주력했습니다.

부커 워싱턴은 1856년 4월 5일, 버지니아주 프랭클린 카운티에서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백인 아버지와 담배 농장의 노예 요리사인 어머니 제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제인은 아들 이름을 부커 탤리어페로 지었지만 나중에는 부커로만 불렀습니다. 어머니 제인은 부커를 낳은 후 워싱턴 퍼거슨이라는 노예와 결혼했습니다. 부커는 친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성을 알수 없었습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정식 이름을 물어보자 그는 의붓 아버지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 그대로 굳어져 부커 워싱턴이 됐습니다.

노예해방 선언이 나온지 2년 후인 1865년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소금광산에서 일하는 남편에게로 갔습니다. 부커가 버지니아 주 경계를 벗어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9살이 된 부커에게는 그곳에서 소금을 포장하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탄광에서 일을 했습니다. 광산에서 일하면서 부커는 광산 소유주 부인의 집에서 심부름꾼으로도 일했습니다. 다행히도 그 부인은 부커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읽고 쓰는 것을 배우고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부커 워싱턴은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더 나아가 나의 동족, 즉 흑인들을 깨우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광산에서 일하는 동안 워싱턴은 버지니아 주 햄턴에 햄턴 인스티튜트(Hampton Institute)라는 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1868년에 세워진 이 학교는 구 노예와 그 자녀들에게 정식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학교는 독해, 지리 등 전통적인 교과과정 외에 교사양성, 목공, 벽돌공, 양재 등 다양한 실업 과목들도 가르쳤습니다. 흑인들을 노예의 수준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워싱턴은 그 학교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1872년 16살이 된 워싱턴은 돈이 없어 800 Km가 넘는 거리를 거의 걸어서 햄턴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학교 당국에 청소부로 일할테니 공부를 하게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들어간 부커는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설립자 햄턴은 부커 워싱턴이 개교 이래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1875년 학교를 졸업한 워싱턴은 워싱턴 디시에 있는 웨일랜드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워싱턴은 다시 햄턴 인스티튜트로 돌아와 교사가 됐습니다.

교사로 일하면서도 워싱턴은 늘 더 큰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는 뜻밖에도 빨리 찾아왔습니다. 햄프턴의 교장 사무엘 암스트롱(Samuel C. Armstrong)은 1881년 앨라배마주에 신설된 흑인 사범대학 터스키기 전문학교의 초대 학장으로 워싱턴을 추천했습니다.

학장으로 부임한 부커 워싱턴은 일생동안 이 학교를 우수 대학으로 발전시키는데 헌신했습니다. 이 학교는 1881년 7월 4일 개교했습니다. 최초의 학생은 겨우 30명에 불과했습니다. 교수는 부커 워싱턴 혼자 였습니다. 강의는 옆의 교회 공간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러 찾아왔습니다.

워싱턴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학교는 급속히 발전해 1900년에는 학생 수가 천여명, 교수는 8명으로 늘었습니다. 1915년 부커 워싱턴이 사망했을 당시 터스키기 대학교 재학생은 1,500명이나 됐고, 학교 부지는 3천 500 에이커에, 100여개가 넘는 건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터스키기 전문학교의 급속한 성장에 관심을 갖고 있던 조지아 주 애틀란타의 목화생산주 국제 박람회는 워싱턴에게 강연을 요청했습니다. 남부의 백인 남녀가 모이는 국제적인 행사에서 흑인이 연설을 한 것은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애틀란타 타협연설로 불리우는 이날 연설에서 그는 흑인의 경제적 기회란 남부에나 국가 전체에나 잠재적인 성공 스토리를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흑인들이 노예 생활 중 충실한 종임을 입증했으며,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백인들과 함께 할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워싱턴 연설의 절정은 다섯 손가락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흑인과 백인은 사회적으로 손가락처럼 갈라져 있다. 그러나 서로의 발전을 위해 한 주먹으로 뭉쳐질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그의 연설에 청중들은 환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신문들이 그의 연설을 보도함으로써 부커 워싱턴은 하루밤 사이에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워싱턴의 지론은 당시의 상황으로 볼때 흑인들은 수적으로 열세이므로 대결은 재앙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협력적인 백인들에게 협조하는 것이 결국 인종주의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유명세를 타고 그의 모금 활동은 순조로워 지고 터스키기 대학은 더욱 확장됐습니다. 교육문제에 관한 워싱턴의 노력은 많은 주요 백인 자선사업가들로부터 도덕적 재정적 후원을 얻어내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워싱턴은 1900년 전국 흑인 기업연맹을 결성해 경제력 향상을 도모했습니다.

부커 워싱턴은 1901년에는 백악관에 초청돼 대통령과 만찬을 하는가 하면,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윌리암 태프트 대통령의 흑인문제 최고 고문이 됐습니다.

그러나 급진적인 흑인 민족주의자들과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 NAACP의 지도자들은, 워싱턴의 노선을 백인에게 순순히 복종하는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또 다른 저명한 흑인 교육운동가 듀보이스는 타협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워싱턴과 듀보이스 지지파의 갈등은 애틀란타 연설 후 20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햄프턴과 터스키기 대학은 계속 흑인 지도자들과 교사들을 배출했습니다. 워싱턴은 더 나아가 그의 자선 조직을 동원해 남부에 흑인들을 위한 공립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기금을 조성했습니다.

하바드 대학교는 미국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부커 워싱턴에게 명예 석사학위를 수여했고, 다트머스 대학은 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고 터스키기 총장으로써의 학교 운영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부커 워싱턴은 1915년 건강이 갑자기 악화됐습니다. 그는 뉴욕 여행 중 쓰러졌고 신장 질환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서둘러 터스키기 대학으로 돌아왔으나 1915년 11월 17일 5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학교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거의 8천명에 달하는 조문객이 모여 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그가 타계한 후에도 남부 흑인들을 위한 교육 사업은 계속 확대됐습니다. 1940년 미 우정국은 유명 인사 우표 시리즈에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부커 워싱턴 우표를 발행했습니다. 미국 내 많은 초중고등학교는 그의 공로를 기려 부커 T. 워싱턴을 학교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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