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주요 신문과 방송은 2021 년 3월 5일, 미국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이 하와이에 있던 무명용사 유해에서 캔자스주 출신 에밀 카폰 군종 신부의 유해를 확인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에밀 카폰은 가톨릭 신부이며 미국 육군대위로, 2차대전과 한국전에 군종 신부로 종군했습니다.
한국전쟁 중 카폰 신부는 참호 속의 부상병들을 끌어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죽어가는 병사를 위해 임종기도를 바치며,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부대가 포위되자 탈출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뒤에 남아, 병사들에게 영적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부상병을 보살피며, 음식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이질과 폐렴으로 숨을 거둘때까지 살신 성인의 짧은 인생을 살다 선종했습니다.
에밀 죠셉 카폰은 1916년 4월 20일, 미국 중부 지방인 캔사스 주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이민와 농사를 짓는 분들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리스도 신앙이 깊었던 에밀은 1940년 센트루이스의 켄리크 신학교(Kenrick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캔사스 주 위치타 교구로부터 가톨릭 신부로 서품됐습니다.
에밀 카폰 신부는 1944년 동부 매사츄세츠 주에 있는 미 육군 군종학교에 들어가 수련을 한 다음, 장교로써 여러 군 부대에서 장병들의 영적 지도를 담당했습니다.
2차 대전중이던 1945년 카폰 신부는 인도로 발령을 받고 버마 전선에서 복무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48년에는 주일 미군 군종 사제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그것이 부모님들, 그리고 캔사스 주 고향과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1950년 카폰 신부는 제 1 기병사단 8 기병연대에 배치됐습니다.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한지 한달이 채 안된 1950년 7월 16일, 1 기병사단은 최초로 한국에 상륙했습니다. 1 사단은 증원군이 도착할때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작전을 폈습니다. 북한군과 여러 차례 접전이 벌어졌으나 숫적으로 열세인 미군은 그때 마다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전투에서 카폰 대위와 그의 부관은 북한군이 공격을 퍼붓는 가운데 미군 한명이 낙오돼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구조대원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총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전방으로 달려가 그 장병을 끌고 나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카폰 대위는 나중에 동성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9월 중순,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카폰 대위 부대와 유엔군은 북한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북진했습니다. 10월 9일, 8연대는 38선을 넘고 평양을 탈환했습니다. 카폰 부대는 뒤를 이어 중국과의 국경선 80 Km지점까지 올라갔습니다.
이 기간 동안 카폰 신부는 포화 속에서 부상자를 구출하고, 장병들에게 세례를 주고, 고백성사를 들으며, 집차 위에 흰 보를 깔고 미사를 올렸습니다.
카폰 신부는 강론에서 하느님이 주신 평화란, 고통 중에도 있고 전쟁 중에도 있다며 장병들을 위로했습니다.
미사 도중 적의 포화에 집차가 파괴된 적도 여러번 이었습니다. 카폰 신부는 총탄이 난무하는 중에도 숨을 거두는 장병을 위해 임종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가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는 자신이 살아 있음은 다른 사람들의 기도 해준 덕이라 믿는다고 썼습니다.
북으로 진격하던 미군은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에 부딛쳤습니다. 1950년 11월 1일, 약 2만명의 중공군은 운산 부근에 있던 제 8기병 연대를 포위 공격했습니다. 상부에서는 후퇴명령을 내렸습니다. 8연대는 각기 험로를 뚫고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3대대 병력 800여명은 고립됐습니다.
중공군은 고립된3대대를 향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습니다. 카폰 대위는 총탄이 날아오는데도 참호를 돌아다니며 부상병들을 찾아 안전한 곳으로 끌어왔습니다. 끌고 올수 없을때는 구덩이를 더 깊이 판 다음 총탄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지휘부에서는 카폰 대위에게 탈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카폰은 부상병들을 도와야 한다며 후퇴를 거부했습니다.
카폰 대위는 부상병들을 보살피다 중공군과 부딛쳤습니다. 같은 부대원이었던 허버트 밀러도, 죽음의 위기에서 카폰 신부가 자신을 살렸다고 증언했습니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참호 속에 쓰러져 있던 중 적군이 다가와 그를 사살하려 할때, 카폰 신부가 목숨을 걸고 적군의 총을 밀쳐내며 부상한 자신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카폰 신부는 심지어 교전 중 다친 중공군 장교까지 돌보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전투에서 카폰 대위는 적의 총탄이 퍼붓는데도 거의 40명의 목숨을 구해냈습니다.
1950년 11월 2일, 카폰과 동료 병사들은 결국 중공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포로들은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 며칠 동안 140 Km를 걸어 운산 북쪽 삼막골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카폰 대위는 휴식도 마다한채 들것에 부상병을 나르거나 어깨에 부축하고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병사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독려했습니다.
수용소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영양실조, 질병, 온 몸을 기어다니는 이, 극도의 한파 속에서 어떤 때는 하루에 12명이 죽어나가기도 했습니다. 수용소에서 중공군은 사상교육을 강행했습니다. 카폰 신부는 인내와 예의를 갖추어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카폰 대위는 부상한 동료 포로들의 옷을 대신 빨아주었고, 목숨을 걸고 밤이면 몰래 중공군 창고에 들어가 음식을 가져다 굶주리는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병사들에게 신앙심을 굳게 하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격려했습니다. 어느날 밤 카폰 대위는 중공군으로부터 말을 듣지 않는다며 극심한 구타를 당했습니다. 이어 겉옷도 빼앗긴 채 영하의 기온 속에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카폰 신부는 폐렴과 이질에 걸렸습니다. 중공군은 그를 불결하고 난방도 안되는 벽동의 오막사리로 격리시켰습니다. 여러 달 동안의 수용소 생활에 극도로 허약해지고 병든 카폰 신부는 1951년 5월 마지막으로 부활절 미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1951년 5월 23일,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35세였습니다.
카폰 신부와 함께 지냈던 전우들과 생존 포로들은 그의 위대한 희생을 낱낱이 증언했습니다. 전선에서 꽃핀 카폰 신부의 박애 정신은 이렇게 알려졌고, 1954년 그의 생애를 담은 '종군 신부 카폰 이야기'라는 책이 발간됐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카폰 신부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천명의 전사자들과 함께 압록강 가까운 곳에 묻혔을 것으로 추측만 할 뿐이었습니다.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은 호놀룰루 국립묘지의 무명용사 유해를 분석하던 중 에밀 카폰 신부의 치아 기록과 DNA가 고향에 살고 있던 카폰 신부의 동생 유진 카폰 씨의 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전사자 확인국은 카폰 신부의 조카 레이 카폰씨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유해는 1956년 경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국립묘지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유진 카폰씨의 아들 레이 카폰 씨는 큰 아버지의 유해가 70년이 지난 후에 확인됐다는 보도에 감격을 억누를 수 없다며, 이는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에밀 카폰 군종신부는 그의 생전과 사후에 많은 훈장을 받았습니다. 바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미국 대통령이 군인에게 수여하는 최상위 훈장인 Medal of Honor, 즉 영예의 메달을 수여했습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카폰 신부가 전쟁터의 목자로 불리우고 있다며, 그의 선함과 자비를 겪은 동료 병사들은 그를 성인이라 분른다고 말했습니다.
카폰 신부의 출신 교구인 위치타 교구는 오랫동안 그의 시복 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3년 카폰 신부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했습니다. 이는 성인으로 추존하기 위한 첫 단계 과정이며 이제는 그의 기적 심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에밀 카폰 신부의 용기와 믿음, 지도력은 수 천명의 미군들이 지옥같은 상황에서도 위협과 세뇌공작에 무너지지 않고 하느님과 국가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원천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