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월 셋째 월요일은 미국의 대통령의 날입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고 여러 분야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단행한 제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저술가였고, 과학자이며, 목장주에다, 사냥꾼, 자연보호 운동가였으며, 경찰서장, 군인, 주 의원, 지사,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했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858년 10월 27일, 뉴욕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니어, 어머니는 마사 벌로치 루스벨트였습니다.
그는 어려서 티디(Teedie), 그리고 나중에는 테디 (Teddy)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웠습니다. 티디는 어려서 몸이 무척 허약했습니다. 그러나 십대가 되자 본격적으로 체조와 역도 등으로 체력을 단련해 건강한 몸을 갖게 됐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명문 하바드 대학을 졸업하고 앨리스 해서웨이 리와 결혼했습니다. 그는 이어 콜럼비아 로 스쿨에 들어갔지만 법학에 흥미가 없어 일년만에 자퇴하고 뉴욕 주 의원에 출마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23살의 젊은 나이에 주 의원에 당선됐습니다.
두 차례 주 의원 임기를 마친 1884년, 불행하게도 어머니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빠진 루스벨트는 사우스 다코타 테리토리, 뱃랜드(Bad Land)에 있는 자신의 목장으로 갔습니다. 그는 사냥도 하고 소떼도 보살피면서 당시로서는 개척지인 그곳의 보안관으로도 활약했습니다.
얼마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어렸을 적 친구 에디스 커밋 캐로우 (Edith Kermit Carow)와 재혼했습니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을 포함해 루스벨트는 모두 여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은 루스벨트가 공화당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해 그를 미국 인사위원회 위원, 그 뒤를 이어 뉴욕 시 경찰청장에 임명했습니다. 경찰청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정치인들의 부패를 적발해 성역을 가리지 않고 처벌하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1897년 윌리암 매킨리 대통령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 미 해군성 차관보로 발탁했습니다.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전쟁이 벌어지자 루스벨트는 해군성 자리를 버리고 민병대를 조직했습니다. 이 부대는 제1의용기병대로, '러프라이더 연대'(Rough Rider) 로 불리웠습니다. 그는 민병대를 이끌고 쿠바로 건너가 스페인과 쿠바 연합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습니다. 어느 정규군보다도 용감하게 싸운 의용기병대는 특히 산후안 고지 전투에서 압도적인 수의 상대를 과감한 공격으로 대파했습니다. 루스벨트는 국민적 영웅이 됐습니다.
돌아온 전쟁영웅 루스벨트는 뉴욕주 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루스벨트는 과감한 개혁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인맥과 연줄로 채용된 공직자들, 부패한 공직자들, 무능력한 공직자와 경찰 등을 해임하고 공무원 공개 채용 제도를 확립했습니다.
1900년 매킨리 대통령의 2차임기 선거에서 루스벨트는 부통령 후보가 됐습니다. 매킨리-루스벨트 팀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901년 9월 6일, 매킨리 대통령은 뉴욕주 버팔로에서 열린 팬 아메리칸 박람회에 참석했다가 리온 촐고스라는 무정부 주의자의 총격을 받고 숨졌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매킨리의 뒤를 이어 갑작스레 제 2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만 43세가 채 안된 나이여서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이 됐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거대 독점기업들이 공정하고 자유로운 거래행위를 위축시키는 횡포를 막기위한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석유, 철도 등 대 재벌들과 공화당 보수파의 반발은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점금지법인 셔먼법을 만들어 공정한 경쟁과 소비자 보호 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연보존 정책도 적극 추진했습니다. 그는 미국 서부에 대규모 댐 건설 사업등에 제동을 걸고 광대한 지역의 자연이 파괴되는 현상을 막도록 했습니다. 또한 무려 2억 에이커에 달하는 삼림, 야생동식물 보호지역, 자연보호지역을 선포해 훼손을 막았습니다.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 엘로우스톤도 그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그러한 진보주의적 성향과 재벌그룹의 파괴자라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공화당원들과 경제적 이익을 얻는 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큰표차로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대외정책에서 테디 루스벨트 대통령은 고립주의에서 탈피하고 국제사회에서의 책임을 다한다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903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파나마를 콜럼비아의 영향권에서 분리시키고, 미국의 운하 건설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파나마 운하는 그의 임기가 끝난 후인 1914년 완공됐습니다. 그는 또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역할을 늘리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 임기 말에는 미국 해군력이 세계 정상급 수준으로 부상했습니다.
그는 1904년과 1905년의 노일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주도했고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주둔을 묵인하는 안에 합의했습니다.
1909년 임기를 마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곧 이어 10개월간의 아프리카 수렵과 유럽 여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국제적 지도자로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후임자인 윌리암 태프트 대통령이 약속했던 진보주의 정책을 계속하지 않자 루스벨트는 지지자들과 함께 진보당을 창당하고 다시 대선에 도전했습니다.
1912년 10월 14일, 루스벨트가 위스컨신주 밀워키에서 선거 유세를 벌이고 있을 때, 존 플라밍 슈랑크라는 사람이 그를 저격했습니다. 총알은 가슴에 맞았으나 안경집과 두툼한 연설문 뭉치를 뚫고 지나가는 바람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루스벨트는 총상으로 가슴에 핏자국이 보이는 중에도 90분에 달하는 긴 연설을 마치고 나서야 의료진의 검진을 받는 강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공화당이 분열되는 가운데 민주당의 위드로우 윌슨 대통령이 큰 표차로 당선됐습니다. 루스벨트는 1914년 유럽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미국이 참전해야 된다고 주장하며 중립을 지키려는 윌슨 대통령을 비판했습니다. 결국 미국도 1917년에 참전을 하게 되자 루스벨트의 네 아들은 모두 자원 입대해 전선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중 루스벨트가 가장 사랑하던 20세의 막내 아들 쿠엔틴은 독일 공습을 나갔다가 비행기 격추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1919년 1월 6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잠을 자다 폐혈관이 막혀 숨을 거두었습니다. 60세로 생을 마칠때까지도 정신적으로 강인했던 그는 뉴욕의 오이스터 베이에 있는 가족 묘지에 묻혔습니다.
미국은 사우스 다코다 주 거대한 돌산에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과 함께 그의 석상도 새겨놓고 열정 넘쳤던 젊은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