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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베를린 올림픽의 육상 영웅, 제시 오언스


[인물 아메리카] 베를린 올림픽의 육상 영웅, 제시 오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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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베를린 올림픽의 육상 영웅, 제시 오언스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제시 오언스
제시 오언스

올림픽 역사상 가장 뛰어난 육상 선수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는 제임스 클리블랜드 오언스, 일명 제시 오언스가
출전한 올림픽은 1936년의 베를린 대회였습니다. 한국의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한 바로 그 대회였습니다.

당시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가 통치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그의 인기가 광적일 정도로 열을 뿜고 있었습니다. 제시 오언스는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려던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흑인으로서 그 신화를 깨뜨린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오언스는 100m, 200m, 400m 계주, 그리고 멀리 뛰기 등 4종목에 출전했습니다. 맨 먼저 출전한 것은 현대 올림픽의 하이라이트인 100m 달리기였습니다. 100m는 오언스의 최강 종목이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히틀러도 직접 경기장에 나와 긴장된 모습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히틀러가 여기 나온 것은 그때 강력한 우승 후보가 바로 독일의 에릭 보크마이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시 오언스는 10초 3 세계 타이 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2위도 미국의 멧칼프가 차지했습니다.

이어 출전한 멀리 뛰기에서도 오언스는 1위를 차지합니다. 강력한 경쟁자는 유럽 신기록 보유자인 독일의 루쯔롱. 그러나 오언스는 예선에서 거듭 실패를 합니다. 이때 독일 선수가 친절하게 오언스에게 조언을 해줍니다. 그 결과 오언스는 간신히 결승에 진출하고 결국은 금메달까지 차지했습니다.

8.06m 신기록. 이후 몇십 년 동안 아무도 멀리 뛰기에서 오언스의 기록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2위 독일 선수는 시상식이 끝나고 오언스와 함께 팔짱을 끼고 웃으면서 걸어 나오고 함께 사진도 찍습니다. 보기 좋은 인종 화합의 모습이었습니다.

오언스는 200m 달리기에서도 20.7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땄습니다. 세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자 제시 오언스의 이름은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어 400m 계주에서는 39.8로 또 세계 신기록이 나왔습니다.

이로써 제시 오언스는 베를린 올림픽 4관왕이 됐습니다. 미국에서는 온 나라가 환호했습니다. 그가 돌아오자 뉴욕시와 모교인 오하이오 주립대학이 있는 콜럼버스에서는 환영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어떤 분석가는 오언스는 돌아오면 10만 달러는 쉽게 벌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웅이 돼서 돌아왔지만 흑백 차별이 심했던 당시 그에게 막상 정규직 일자리를 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오언스는 세탁소, 주유소 펌프맨, 운동장 청소부 등 저임금 노동을 하는 한편, 유명 흑인 연예인과 춤도 추고, 마을 축제장에서 모터사이클이나 말과 달리기를 하는 쇼 등, 온갖 잡일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이던 당시 그는 백악관의 초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대통령 자유메달을 받은 건 베를린 올림픽 40년이나 지난 후인 19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였습니다.

제시 오언스는 1913년 남부 앨라배마주 오크빌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제시는 10명의 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아버지 헨리와 어머니 에마는 갖고 있는 토지도 없고 겨울이 돼도 땔감이 없어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가난 속에 어려서 세상을 떠난 형제자매도 있었습니다.

어린 제시는 몸이 허약한데다 자주 기관지염을 앓았습니다. 부모들은 가난이 싫고 인종 차별이 심해 그가 10살 때 북쪽인 오하이오주로 이사를 갔습니다. 전학한 학교에서 제임스 클리블랜드를 약자 ‘J.C.’라고 말했는데, 교사가 남부 억양으로 하는 발음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Jesse’로 기록을 해, 결국 그것이 오언스의 평생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제시는 ‘찰스 라일리’라는 선생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침이면 매일 제시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때로는 제시를 집에 초대해 가족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 수업이 끝난 후 육상을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제시가 너무 허약해서 운동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라일리 선생은 제시가 육상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라일리 선생은 사람의 피부색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제시를 대했습니다.

제시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있는 동안에도 꾸준히 육상을 계속한 제시 오언스는 재학 중 여러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습니다. 특히 베를린 올림픽 한해 전인 1935년에는 미시간주에서 열린 미국 중서부 10대 대학 육상대회에서 세계 신기록 3개, 세계 타이기록 한 개를 수립하는 놀라운 실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올림픽 선수로 선발됐습니다.

제시 오언스는 올림픽이 끝난 후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젊은이들의 개발을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청년들에게 자신의 노력과 성공, 어려움의 극복 등 강연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을 위한 노력으로 공로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활도 차츰 나아졌습니다. 그는 자서전도 쓰고, 베를린 올림픽 다큐멘터리 제작에 내레이터로도 등장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제시 오언스를 스포츠 대사로 임명하고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도록 했습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 자문위원으로도 활약했습니다.

올림픽으로 가는 길은 어느 도시나 국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최선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강조한 제시 오언스, 그는 66세 때인 1980년 애리조나주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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