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가능 링크

한국전 정전협정 64주년...전쟁부터 휴전까지


6·25전쟁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7.27)을 기념해 한국 국가보훈처가 초청한 유엔참전용사들이 26일 서울현충원을 방문했다.
6·25전쟁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7.27)을 기념해 한국 국가보훈처가 초청한 유엔참전용사들이 26일 서울현충원을 방문했다.

6.25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오늘(27일)로 체결 64주년을 맞았습니다. 북한은 정전협정 기념일을 미국이 항복한 ‘전승절’로 왜곡선전하며 해마다 성대한 기념식을 합니다. 하지만 미국 관리들은 빛과 어둠으로 극명하게 갈리는 남북한의 야간 위성사진 한 장이 모든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며 북한 정부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64년 전 정전협정이 어떻게 체결됐는지, 김영권 기자가 되돌아봤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북-중 공산군을 대표한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이 역사적인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합니다.

지난 1953년 7월 30일 마크 클라크 유엔군 최고사령관이문산 유엔군 기지에서 한국전쟁 정전협졍에 서명하고 있다.
지난 1953년 7월 30일 마크 클라크 유엔군 최고사령관이문산 유엔군 기지에서 한국전쟁 정전협졍에 서명하고 있다.

이후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펑더화이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관, 김일성 북한 군 최고사령관이 각각 협정문에 서명하면서 3년을 넘게 한반도에서 지속된 총성이 멎었습니다.

문산 유엔군 기지에서 협정에 서명한 뒤 이를 공식 발표하는 클라크 사령관입니다.

[녹취: 클라크 사령관] “We have stopped the shooting…”

하지만 정전협정은 협상부터 서명까지 무려 2년이 걸릴 정도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6.25전쟁은 서방뿐 아니라 옛 소련 정부 공식 문건에서 확인됐듯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군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됐습니다.

북한 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순식간에 남한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유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됐습니다.

하지만, 중군군의 개입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한국 군과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1951년 초부터 38선 부근에서 서로 일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치열한 교전이 고착됐습니다.

[녹취: 전쟁 포격 소리]

이 때부터 양측에서 모두 ‘휴전’에 관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51년 6월 23일 야콥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대사가 유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전을 위한 대화를 촉구하면서 협상이 본격화됐습니다.

[녹취: 말리크 대사] “The Soviet peoples further believe that the most acute problem of the present day-the problem of the armed conflict in Korea could also be settled……”

말리크 대사는 양측이 38선에서 철군하고 정전을 위한 대화를 시작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유엔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력을 많이 상실한 북한 군은 중공군에 크게 의존하는 형국이었고 펑더화이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관은 신속한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휴전을 지지했습니다.

미국 역시 국내 여론 악화와 늘어나는 사상자 때문에 휴전을 선호했습니다. 이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매튜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협상을 지시해 7월 10일 개성에서 양측이 첫 정전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군사분계선을 놓고 유엔군은 양측이 맞서고 있는 지역, 공산군은 38선을 고집해 협상이 결렬됐습니다. 양측은 그러나 협상을 재개해 우여곡절 끝에 군사분계선을 현재 접촉하고 있는 곳으로 합의했습니다.

곧 정전협정이 체결될 것처럼 보였던 분위기는 포로 송환이란 장벽에 부딪히면서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졌습니다.

공산군은 적대행위가 끝나면 바로 포로를 석방하고 송환해야 한다는 제네바협정에 근거해 모든 포로의 송환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가운데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이 5만 명이 넘자 인도적 차원에서 자동 송환이 아닌 자유 송환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유엔군이 국제적십자사에 통보한 공산군 포로는 의용군을 제외하고도 13만2천500명. 이 가운데 북한 군에 강제로 끌려갔거나 공산주의에 반대해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이 수 만 명에 달했던 겁니다.

반면 북한 군 총사령부가 1951년 6월에 발표한 한국 군과 유엔군 포로는 10만8천 명. 하지만, 북한이 한국 군을 북한 군에 다시 편입시키거나 강제로 주민 명단에 편입시키면서 유엔군에 통보한 숫자는 1만1천559명에 불과했습니다.

포로 송환의 원칙과 규모를 놓고 의견이 대립하면서 양측의 협상은 1년 넘게 지속됐고, 전투도 계속됐습니다.

하지만 1953년 1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과 3월의 스탈린 사망,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 겸 외교부장이 부상포로 우선 송환을 미국에 제안하면서 돌파구가 마련됐습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이후 부상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해 교환을 성공리에 진행했고 6월 8일에 새 포로교환협정에도 서명했습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정전협정이 체결되면 분단이 영구화되고 미군이 철수하면 국가안보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며 정전협정 반대 운동과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이승만 한국 대통령은 극단의 조치로 반공포로 2만7천 명을 전격 석방해 아이젠하원 대통령과 유엔군이 크게 반발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동맹을 맺지 않으면 휴전에 응할 수 없다고 버텼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은 특사를 보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조약의 핵심은 한국 내 미군 주둔과, 동맹이 공격을 받으면 공동위험으로 보고 대응한다는 내용입니다.

이후 일주일 뒤인 7월27일 마침내 정전협정이 체결됐습니다.

제임스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재임 시절 정전 60주년을 맞아 미군 방송에 정전협정의 성과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녹취: 서먼 전사령관] “I think the armistice is established the procedure to have immediate ceasefire…”

정전협정이 즉각적인 휴전을 성사시켜 전쟁 중인 양측을 분리하는 절차를 확립했고, 이후 전쟁 재발 방지에 기여해 왔다는 겁니다.

서먼 전 사령관은 한국이 이 정전체제를 활용해 지금의 세계적인 지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국전 정전 60주년였던 지난 2013년 7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 열병식에서 북한 장갑차가 행진하고 있다.
한국전 정전 60주년였던 지난 2013년 7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 열병식에서 북한 장갑차가 행진하고 있다.

​북한 정부는 그러나 1973년부터 정전기념일을 전승기념일로 바꿔 성대한 기념식을 열고 있습니다. 지난해 기념일에 대표로 연설한 박영식 인민군 대장입니다.

[녹취: 북한 전승절 기념식: 박영식 대장] “7월 27일은 미제의 강도적인 침략으로부터 조국의 존엄과 자주권을 영예롭게 지켜낸 제2의 해방의 날이며 미제에 종지부를 찍은 긍지 높은 승리자의 명절입니다.”

서옥식 한국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은 저서인 ‘북한 교과서 대해부’에서 북한 정부가 학생과 주민들에게 정전기념일을 “미군이 북한에 항복한 날로 왜곡해 가르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패전의 악몽을 떨쳐버리고 주민들에게 호전성을 주입하기 위해 정전기념일을 전승일로 둔갑시켰다”는 겁니다.

주한미군사령부 부참모장을 지낸 브라이언 비숍 공군 소장은 과거 정전기념일을 맞아 미군 방송에,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는 오늘의 남북한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비숍 소장] “Let’s look at (South) Korea today.It is one of the best economies in the world. You can take a picture of satellite picture…”

한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국 가운데 하나로, 한반도를 야간에 촬영한 위성사진을 보면 한국은 모든 지역이 빛나고 있지만 북한은 암흑천지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북한 농업과학원 출신 탈북민 이민복 씨는 VOA에 남북한의 진정한 화해는 북한 주민들이 6.25전쟁의 진실을 바로 알 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민복 씨] “전쟁의 원인을 바로 정확히 가르쳐 주는 것은 증오를 없애고 통일을 이룩하는 디딤돌을 만드는 겁니다. 전쟁 초기 참가자나 38선 주민에게 조용히 물어봐라. 그럼 바른 판단이 나옵니다. 다 얘기해 줍니다. 그래서 6.25의 근원이 김일성에 의한 북한의 침략이란 확신이 들어가면 남한과 미국을 미워할 게 없죠.”

하지만 북한 정부는 27일 정전기념일을 앞두고 다시 다양한 행사들을 열며 북한이 전쟁에서 백전백승을 거뒀다고 주장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XS
SM
MD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