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8대 대통령으로 뽑힌 새누리당 박근혜 당선인은 북한과 아주 특수한 인과의 고리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박 당선인과 북한과의 모질고도 질긴 인연을 정리했습니다.
박근혜 당선인의 인생 행로에 가장 큰 전환점을 만든 것은 바로 북한이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던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문세광이라는 재일 조총련계 한국인의 저격을 받고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박 당선인은 대사관으로부터 급히 귀국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드골 공항에 갔다가 가판대에 꽂힌 신문에서 어머니의 암살 소식을 알고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박 당선인은 지난 1월 한국의 SBS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의 충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녹취: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그걸 읽는 순간 그냥 제 몸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수만 볼트의 전기가 확 훑고 지나가는 듯한, 실제 그렇게 느꼈어요”
아직 학생이었던 박 당선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불과 22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곁에서 사실상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참담한 사건 때문이었지만 박 당선인은 대통령을 옆에서 보좌한 경험이 일찍 국가 경영에 눈을 뜨고 정치 경륜을 쌓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박 당선인이 북한에 대한 투철한 안보관을 보여 준,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화도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하던 날의 일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달 새벽 1시 30분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 박 당선인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경황이 없는 와중에 전방에 이상이 없느냐고 물었던 게 당시 외국 언론에까지 인용되면서 화제가 됐습니다.
박 당선인은 부모를 잃고 야인 생활을 하다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 또 한차례 극적으로 북한과의 인연을 맞게 됩니다.
2002년 5월, 당시 한국미래연합 창당을 준비하고 있던 박 당선인을 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가 느닷없이 평양으로 초청했습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자신의 전용기를 중국 베이징으로 보내 박 당선인을 태워갔을 정도로 극진하게 예우했습니다.
평양 방문 3박4일 기간 중 하루는 김 위원장이 예고도 없이 박 당선인이 머물던 백화원 영빈관을 찾았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1968년 북한군 특수 부대의 1.21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해 당시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질렀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응분의 벌을 받았다고 사과했습니다.
또 두 사람의 아버지인 박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합의했던 7.4 남북공동성명이 결실을 보도록 힘을 합치자고 의견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박 당선인은 당시 북한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뒤 문세광 사건 등에 대해선 북한의 사과를 받지 못했다는 지적에 대해 자신의 방북은 사과를 받으러 간 게 아니었다며 냉정하고 단호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박 당선인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북한을 이제 한국의 최고 지도자라는 입장에서 맞게 됐습니다.
박 당선인은 이미 발표한 대북 정책 공약에서 남북간 교류 협력을 활성화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에 각각 교류협력사무소를 설치하고 북한 지도자와도 만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유호열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는 박 당선인이 대북 정책을 펴나가는 데 있어서 개인의 감정에 흔들릴 인물은 아니라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유호열 고려대학교 교수] “그렇기 때문에 2002년에도 북한에 가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서 회담도 하고 지금 남북관계 상황이 썩 좋은 상황이 아니지만 그래도 북한에 대한 대화나 교류 협력에 대한 그런 의지는 나름대로 진정성이 있다고 보거든요”
박 당선인은 그러나 남북한 사이의 신뢰 구축이 우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대화에 응해 나오느냐가 박근혜 정부에서 남북관계가 어떻게 펼쳐질 지 관건이 될 것이라는 관측입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
박근혜 당선인의 인생 행로에 가장 큰 전환점을 만든 것은 바로 북한이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던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문세광이라는 재일 조총련계 한국인의 저격을 받고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박 당선인은 대사관으로부터 급히 귀국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드골 공항에 갔다가 가판대에 꽂힌 신문에서 어머니의 암살 소식을 알고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박 당선인은 지난 1월 한국의 SBS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의 충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녹취: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그걸 읽는 순간 그냥 제 몸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수만 볼트의 전기가 확 훑고 지나가는 듯한, 실제 그렇게 느꼈어요”
아직 학생이었던 박 당선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불과 22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곁에서 사실상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참담한 사건 때문이었지만 박 당선인은 대통령을 옆에서 보좌한 경험이 일찍 국가 경영에 눈을 뜨고 정치 경륜을 쌓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박 당선인이 북한에 대한 투철한 안보관을 보여 준,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화도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하던 날의 일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달 새벽 1시 30분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 박 당선인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경황이 없는 와중에 전방에 이상이 없느냐고 물었던 게 당시 외국 언론에까지 인용되면서 화제가 됐습니다.
박 당선인은 부모를 잃고 야인 생활을 하다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 또 한차례 극적으로 북한과의 인연을 맞게 됩니다.
2002년 5월, 당시 한국미래연합 창당을 준비하고 있던 박 당선인을 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가 느닷없이 평양으로 초청했습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자신의 전용기를 중국 베이징으로 보내 박 당선인을 태워갔을 정도로 극진하게 예우했습니다.
평양 방문 3박4일 기간 중 하루는 김 위원장이 예고도 없이 박 당선인이 머물던 백화원 영빈관을 찾았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1968년 북한군 특수 부대의 1.21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해 당시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질렀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응분의 벌을 받았다고 사과했습니다.
또 두 사람의 아버지인 박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합의했던 7.4 남북공동성명이 결실을 보도록 힘을 합치자고 의견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박 당선인은 당시 북한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뒤 문세광 사건 등에 대해선 북한의 사과를 받지 못했다는 지적에 대해 자신의 방북은 사과를 받으러 간 게 아니었다며 냉정하고 단호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박 당선인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북한을 이제 한국의 최고 지도자라는 입장에서 맞게 됐습니다.
박 당선인은 이미 발표한 대북 정책 공약에서 남북간 교류 협력을 활성화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에 각각 교류협력사무소를 설치하고 북한 지도자와도 만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유호열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는 박 당선인이 대북 정책을 펴나가는 데 있어서 개인의 감정에 흔들릴 인물은 아니라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유호열 고려대학교 교수] “그렇기 때문에 2002년에도 북한에 가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서 회담도 하고 지금 남북관계 상황이 썩 좋은 상황이 아니지만 그래도 북한에 대한 대화나 교류 협력에 대한 그런 의지는 나름대로 진정성이 있다고 보거든요”
박 당선인은 그러나 남북한 사이의 신뢰 구축이 우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대화에 응해 나오느냐가 박근혜 정부에서 남북관계가 어떻게 펼쳐질 지 관건이 될 것이라는 관측입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