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리 치솜은 흑인 여성 최초로 미국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대통령 후보 경선까지 나섰던 여성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셜리는 일생 동안 미국 내 흑인, 여성, 소수민족의 권익 증진을 위해 애를 썼고, 이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노력한 여성으로서 더욱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본명은 셜리 애니타 세인트 힐. 1924년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4 녀 중 큰딸로 아버지는 찰스 크리스토퍼 힐, 어머니는 루비 씰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 제과점 일꾼 등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파출부로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이들은 가난했지만, 자녀교육을 매우 중시하는 부모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뉴욕 생활 중에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는 수 없이 5살이 된 셜리를 바베이도스의 외할머니 집으로 보냈습니다.
외할머니 에멀린 씰은 농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외할머니도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셜리는 할머니와 사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비록 교실 한 칸짜리 작은 학교였지만 영국식 교육제도 아래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셜리에게 강인함과 인간의 존엄성,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셜리는 10살 때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셜리는 브루클린에서 우수 학생들만 가는 여자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브루클린칼리지에 가서는 인문학부에 있으면서 특히 미국의 흑인 역사를 많이 공부했습니다. 셜리는 토론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수상도 받았습니다.
1949년 셜리는 자메이카 출신 사설탐정 콘라드 치솜과 결혼했습니다. 이에 따라 셜리의 정식 이름은 셜리 치솜이 됐습니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그 후 약 3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후 셜리는 아더 하드위크 주니어와 재혼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셜리는 보육원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면서 밤에는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초등 교육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셜리는 뉴욕시 아동 복지국에서 일했습니다.
셜리 치솜의 정치 생애는 1964년에 뉴욕 주 의원에 당선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4년 동안 주 의회에서 활동했습니다. 1969년 셜리 치솜은 연방 의회로 진출했습니다. 1968년 선거에서 새로운 지역구인 뉴욕시 제12 선거구에서 출마해 당선된 것입니다.
이로써 셜리 치솜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하원의원이 됐습니다. 치솜이 대변하는 지역은 브루클린의 베드퍼드-스타이브선트라는 가난한 곳으로 주민은 유색인종이 70% 이상이었습니다.
치솜 의원은 하원에서 농업위원회, 재향군인위원회, 교육∙노동위원회, 법규위원회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셜리 치솜 의원은 하원에서 아주 별난 존재였습니다. 우선 외모가 달랐습니다. 검은색 피부에 구름같이 큼직한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안경도 큼직한 것을 썼습니다. 말투도 바베이도스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던 때의 영향을 받아 카리브해 억양이 섞여 있었습니다.
치솜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발언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녀 자신도 자신의 최고 무기는 바로 입이라고 말했습니다. 치솜은 의회에서나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말하기 꺼리는 것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셜리 치솜 의원은 가난한 자와 여성들을 위한 여러 안건을 강력히 추진했습니다. 치솜 의원은 아프리카계 흑인들을 위한 민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1969년에는 의회 내 흑인 의원 코커스를 구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치솜은 또한, 전국 여성 기구의 회원이기도 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일명 인디언과 중남미계 이민자를 포함한 유색인종의 권리 증진을 위한 운동에도 적극 가담했습니다. 치솜은 미국 사회가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한데 어울려야 한다는 점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치솜 의원은 1970년 ‘Unbought and Unbossed’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냈습니다. 뉴욕시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나 대통령 후보 경선에까지 나아가기까지 자신의 삶을 소개한 책입니다. 치솜은 인종적 비교로 정의되는 것을 거부했고, 당의 정치노선에만 따르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1972년 셜리 치솜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민주당 후보 경선에 뛰어든 것입니다. 여성이자 흑인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선 최초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러나 치솜은 흑인을 대표해 출마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나는 여성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긍지를 갖고 있지만, 이 나라의 여성 운동을 위해 출마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정치적 보스나 특정 이익 단체의 후보가 아닙니다. 나는 전 국민의 후보입니다.”
그러나 치솜은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는 데 실패했습니다. 치솜은 꼭 자신이 이길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지를 일깨우려고 출마했다고 말했습니다. 1973년 치솜은 또 다른 책을 펴냈습니다. ‘좋은 투쟁(The Good Fight)’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치솜은 자신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대해 나중에 여성이나, 흑인이나, 유대인이나, 또는 아직 국가수반의 자리에 앉힐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어떤 다른 그룹의 후보가 출마했을 때, 그 후보에 대해 사람들이 친숙하게 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습니다.
셜리 치솜은 14년 동안의 의정 생활을 마치고 1982년 의회를 떠났습니다. 치솜은 보수적인 세상이 되면서, 진실되고 강력한 정치를 표방하는 자신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의회를 떠난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셜리 치솜은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마운트 홀리요크 대학의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치솜은 정치학, 사회학, 특히 인종과 여성에 관련된 과목들을 많이 가르쳤습니다. 또한, 남부 애틀랜타에 있는 흑인 명문 여자대학 스펜만 컬리지에서도 초빙 교수로 강의했습니다.
그 외에도 치솜이 특강을 한 대학은 150군데가 넘었습니다. 여러 대학은 치솜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치솜은 여러 해에 걸쳐 기관이나 단체로부터 초빙받아 많은 연설을 했습니다. 치솜은 여러 해에 걸쳐 기관이나 단체로부터 초빙받아 많은 연설을 했습니다. 치솜은 각기 다른 소수민족 그룹도 방문하고, 지역 사회 차원에서부터 강력한 목소리를 내라고 조언했습니다.
“배제냐 포용이냐의 선택에 직면해 있는 미국은 포용을 선택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미국이 지향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강조한 치솜은 1991년 은퇴했습니다. 한 기자로부터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을 받고 셜리 치솜은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하원의원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용기 있는 사람, 변화를 만들어 낸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셜리 치솜은 2005년 1월 1일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80세였습니다. 타계 후이기는 했지만 바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5년 치솜에게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 메달을 수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