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30여 년 동안 미 항공우주국(NASA)에 몸담으며 여성과 흑인이라는 이중의 장벽을 뚫고 우주개발에 지대한 기여를 한 수학자 캐서린 존슨의 이야기입니다.
캐서린은 1918년 8월 26일 웨스트버지니아주 화이트 설퍼 스프링스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적 이름은 크레올라 캐서린 콜맨이었습니다. 아버지 조슈아 콜맨은 농부, 어머니 조일렛은 학교 교사였습니다.
캐서린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숫자 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부엌에 접시가 몇 개이고 교회로 가는 길에 계단이 몇 개인가 등등. 같은 또래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숫자 놀이를 좋아한 것입니다.
흑백 교육이 따로 실시되던 시절, 캐서린이 사는 지역에서는 흑인이 6학년 이상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콜맨은 캐서린을 200km나 떨어진 인스티튜트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는 흑인도 다닐 수 있는 웨스트버지니아 주립 대학 부설 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불과 10살 때 고등학교에 입학한 캐서린은 14살에 졸업을 했습니다. 그 후 웨스트버지니아 주립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불과 대학 2학년 때 캐서린은 그 대학에서 가르치는 수학 과목을 모두 이수했습니다.
당시 지도교수는 윌리엄 월든 쉐플린 클레이터였습니다. 저명한 수학자였던 클레이터 교수는 17살인 캐서린 한 사람을 위해 해석-기하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해 주었을 만큼 그녀의 재능을 아꼈습니다. 이때 배운 해석-기하학은 나중에 캐서린이 나중에 나사(NASA)에 들어가 우주선의 비행 궤도를 계산할 때 중요한 지식이 됐습니다.
캐서린은 수학과 프랑스어 복수 전공으로 대학을 수석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캐서린은 수학 연구원으로 일하고 싶었으나 어디에서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대신 캐서린은 버지니아주 매리언에 있는 흑인 공립학교의 교사로 들어갔습니다.
화학 교사인 제임스 프랜시스 가블과 결혼한 캐서린은 1940년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고등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곧 임신하게 되자 캐서린은 남편과 함께 다시 매리언으로 돌아와 10여 년 동안 육아와 교직에 매달렸습니다.
1952년 캐서린은 미 항공우주국(NASA)의 랭리센터에서 흑인 여성 수학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랭리센터는 1917년 미국항공자문위원회(NACA)에 의해 세워진 가장 오래된 항공 우주 센터입니다. NACA는 오늘날 미 항공우주국(NASA)의 전신입니다.
이 센터는 엄청난 양의 숫자를 일일이 손으로 처리해야 하는 남성 엔지니어들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1935년부터 백인 여성 수학 전공자를 고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그곳에는 계산원으로 수백 명의 여성들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남성 과학자들과는 달리 여성들은 준전문가로 분류되고 같은 일을 하는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항공우주국은 흑인 여성 계산원들도 모집했습니다. 캐서린은 1951년 흑인 여성들만 있는 부서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습니다. 캐서린은 그 후 랭리의 거대 격납고가 있는 비행연구국(FRD)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유일한 흑인인 캐서린은 항공기의 공기 역학을 계산하는 일을 돕게 됐습니다. 캐서린의 뛰어난 수학적 능력은 즉각 빛을 발했습니다. 대학원 학위를 가진 그곳 남자들은 배운 것을 다 잊어버리고 있었으나 캐서린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캐서린은 1956년 첫 남편을 뇌암으로 잃었습니다. 38살이 된 캐서린은 세 딸을 혼자 보살펴야 했습니다. 1959년 캐서린은 육군 대위인 제임스 존슨과 재혼했습니다. 이때부터 캐서린의 정식 이름은 캐서린 존슨이 됐습니다.
1960년대, 소련의 우주인 발사 기술로 미 항공우주국은 커다란 압박을 받게 됐습니다. 그러한 압박은 자연 캐서린이 일하고 있는 비행연구국, FRD로 떨어져, 관련된 각종 수학적 계산을 해내야 했습니다.
캐서린의 과제는 궤도 계산이었습니다. 나사가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발사 조건이 어떤지를 알아야 했고, 비행 현황을 볼 수 있는 대형 화면을 개발하고 어디에 착륙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 캐서린의 정확한 계산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당시 개발된 초기 컴퓨터는 해석기하학을 적용한 풀이 방식을 구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요 우주선의 비행경로는 전적으로 그녀의 계산에 의지했습니다. 캐서린은 미국 최초의 우주인 앨런 셰퍼드의 자유 7호 비행 궤도를 분석했습니다. 앨런 셰퍼드는 소련보다 약 한 달 늦은 1961년 5월 5일,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기권 밖을 비행하고 돌아왔습니다.
1962년 2월 존 글렌은 미국 최초로 지구 궤도 선회 비행에 나섰습니다. 항공우주국이 전자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당시, 존 글렌은 컴퓨터보다도 오직 캐서린 존슨이 직접 수학으로 풀어 OK 한다면 비행에 나서겠다고 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습니다.
캐서린은 완벽한 수학으로 1962년 2월 20일 글렌이 타고 간 우정 7호의 비행 궤도를 분석했습니다. 캐서린은 숫자상 단 하나의 작은 실수만 있어도 우주인과 위성의 운명은 끝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발사 때는 항상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달 착륙 프로그램인 ‘아폴로 계획’, 그 뒤를 이은 우주 왕복선 계획에 이르기까지 캐서린은 미국의 우주 개발에 필수적인 존재였습니다.
캐서린 존슨은 20여 건의 기술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미 항공우주국에서 단독으로 또는 공동으로 연구 논문을 발표한 드문 여성 중 한 명이었습니다. 항공우주국을 은퇴한 후에는 여러 모임이나 학교를 방문하며 수학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했습니다.
2015년 바락 오바마 대통령은 존슨은 우주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존슨 여사에게 미국 시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습니다. 또 의회는 의회 최고 훈장인 '골드 메달'을 수여했습니다.
2017년 미국의 20세기 폭스사는 ‘히든피겨스(Hidden Figures)’, 즉 ‘숨은 인물들’이라는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바로 캐서린 존슨과 항공우주국 내 다른 두 흑인 수학자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 각색상, 여우 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캐서린 존슨이 누구인지, 그가 끼친 공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NASA는 존슨의 업적을 기려 NASA 랭리연구센터 내에 화성과 달 등 유인 우주탐사 계획에 필요한 각종 궤도계산 임무를 담당하는 ‘캐서린존슨계산연구소’를 개설했습니다. NASA가 백인 남성 대신 흑인 여성의 이름을 따 연구시설의 이름을 지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캐서린은 2020년 2월 24일, 101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캐서린 존슨이 보여준 한 세기 동안의 이력서는 영화에서처럼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 삶의 기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