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국제축구연맹(FIFA)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여자 월드컵 경기를 중계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FIFA는 북한에 중계권을 준 적 없다며 조사에 착수할 뜻을 시사했습니다. 함지하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북한이 지난 7월 방영한 2023 국제축구연맹(FIFA)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 녹화 중계 화면엔 좌우측 상단이 뿌옇게 처리됐습니다.
화면 속 내용을 알아볼 수 없도록 일명 ‘블러’ 처리를 한 것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화면의 한 부분을 지운 뒤 바로 옆 부분을 복사해 채워 넣고 이 부분 전체를 다시 뿌옇게 만들었습니다.
‘블러’ 처리된 부분은 경기 중간중간 화면 우측 하단에도 등장합니다.
통상 화면 상단과 하단 끝부분에는 방송사나 FIFA의 로고가 붙는 점으로 볼 때 이날 방송을 내보낸 조선중앙TV가 특정 로고를 지우기 위해 이 같은 작업을 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이날 경기는 지난 7월 20일 뉴질랜드와 노르웨이의 개막전이지만 북한은 약 나흘 뒤인 7월 24일 이를 중계했습니다.
문제는 이날 녹화 중계된 방송이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방송의 중계권을 갖고 있는 FIFA는 “해당 토너먼트(2023 여자 월드컵)에 대한 북한 내 어떠한 권리도 허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며 당시 중계방송이 무단 방영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FIFA 홍보실] “… FIFA elected not to license any rights in North Korea for the tournament in question.”
일반적으로 월드컵과 같은 국제 축구 경기는 FIFA로부터 중계권을 구매한 방송사가 중계방송의 권리를 갖지만, 북한은 이런 권리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해당 경기를 중계한 것입니다.
VOA는 최초 북한의 무단 방영 의혹이 제기됐을 당시 FIFA 측에 관련 내용을 질의해 지난 5일 한국의 한국방송공사(KBS)가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대한 중계권을 보유했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FIFA 대변인은 “KBS에 (중계) 권리를 부여했고, KBS는 원할 경우 권리를 재양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며 북한의 무단 중계와 관련해선 “KBS에 문의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KBS 홍보실은 다음날인 6일 VOA의 관련 문의에 “최초 계약에는 방송권리 해당 영토가 한반도 전역이었으나, 대회 개막 이전에 북한 지역의 권리를 FIFA가 가져가는 것으로 합의해 KBS의 대회 기간 중 방송권리 해당 영토가 대한민국에만 국한됐다”며 북한에 대한 중계권 보유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이에 따라 VOA는 FIFA 측에 해당 내용을 다시 문의했고 결국 북한에 대한 중계권이 KBS에서 FIFA로 넘어온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현재로선 어떤 이유에서 KBS가 북한에 대한 중계권을 FIFA로 돌려줬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건 FIFA가 월드컵 대회 기간 북한에 대한 중계권을 보유했고, 이 중계권은 북한 측에 양도되거나 임대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FIFA 관계자는 12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번 사안과 관련한 VOA의 추가 질의에 “FIFA는 저작권 침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여긴다”며 “저작권 침해에 대한 증거가 있다면 FIFA는 잠재적으로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FIFA 관계자] “FIFA takes this issue of piracy very seriously, and if there is evidence of piracy, then this is something FIFA will potentially investigate.”
북한은 지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당시엔 FIFA로부터 무상으로 중계권을 얻은 바 있습니다. 당시 아시아태평양방송 연합이 FIFA와 북한의 중계권 협상을 도운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이번 여자 월드컵 중계와 관련해 별도로 FIFA 측에 협상 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VOA는 유엔주재 북한 대표부 측에 관련 내용을 문의한 상태로 현재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편, 북한이 중계한 경기에선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됩니다.
특히 미국과 한국, 일본 등 주요 국가를 고의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VOA가 확보한 해당 중계방송에서 사회자는 월드컵 출전국을 소개하면서 미국, 한국, 일본을 각각 ‘그 외 1개 팀’으로만 지칭했습니다.
[녹취: 해설자] “5조에는 윁남(베트남) 팀, 네덜란드 팀, 뽀르투갈(포르투갈) 팀 외 1개 팀이 속해 있습니다… 8조에 도이칠란드(독일) 팀과 모르코(모로코) 팀, 꼴롬비아(콜롬비아) 팀 외에 1개 팀이 속해 있습니다."
다만 북한은 경기장 펜스 전광판에 몇 차례 등장한 한국의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광고는 그대로 내보냈습니다.
이에 따라 중계방송에선 경기 중인 선수 옆에 등장하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로고, 그리고 이들의 주요 제품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제품명이 한글이 아닌 영어로 표기된 만큼 북한이 주민들에게 끼칠 영향이 적다는 판단에 따라 광고를 가리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VOA 뉴스 함지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