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이번에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세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07년 7월 박용만이 주도해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서는 향후 국내외 통일 기관을 조직할 것, 이에 대한 준비로 각지에 통신국을 설치해 상호 간에 연락할 것을 의결했습니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은 둔전병제에 바탕을 둔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통과시킨 것입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한국 교원대학 김도훈 교수는 한인군사학교 설립이 독립전쟁을 전개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박용만의 의지가 첫발을 내딛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합니다.
[녹취: 김도훈 한국교원대 교수] “7월 이전에 회의 준비를 하면서 박용만이 나중에 이승만 오른팔 역할을 하는 정한경 등등과 해 가지고 그 회의에서 무엇을 할 거냐 해가지고 여러 가지 논의 사항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힘을 썼던 게 우리 한인군사학교를 만들자 이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그때 회의에 부치는데 그 회의에서 대표적인 것이 뭐를 얘기를 하냐면 우리가 지금 1908년 당시는 이미 고종이 한국에서 강제로 쫓겨나고 의병들이 일어나서 독립전쟁이란 거를, 의병전쟁이란 거를 일으키던 상황이거든요? 사실상 망국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데, 뿔뿔이 흩어진 단체들을 통합을 해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군사학교를 만들자. 그리고 군사학교를 만들어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한 다음에 국권을 되찾자는 그런 의미죠.”
박용만은 애국동지대표회를 마친 뒤 자신이 운영하던 노동주선소 겸 여관을 윤병구에게 맡기고 1908년 가을 학기에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링컨으로 떠났습니다.
이해 9월 네브래스카대학에 들어간 박용만은 겨울부터 동료들과 함께 한인군사학교 설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요. 이와 관련해 김도훈 교수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김도훈 한국교원대 교수] “그러고 나서 회의에 통과가 되니까 애국동지대표회에서 통과가 되자마자 바로 박용만 선생 같은 경우는 군사훈련을 시킬 땅이 필요하잖아요? 그다음에 총기도 필요하고. 그런 거를 마련하려 다니죠. 그런데 이때 총기라는 거는 뭐 실제 총을 가질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목총을 중심으로 했긴 한데 그런 준비 작업을 거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을 하죠.”
드디어 1909년 6월 해외 최초의 독립군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가 커니시의 한 농장에서 설립됐습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학기 중에는 각자 학교에서 공부하다 여름방학 때 입소해 평균 8주간 군사훈련을 받는 하계군사학교 체제로 운영됐고 수학 기간은 3년이었습니다.
미주 한인사 전문가인 안형주 씨는 박용만이 독립전쟁에 나갈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미주 한인사 전문가 안형주 씨] “한인소년병학교의 목적은 독립전쟁을 이끌 장교들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를 세워 현대식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들을 해외 동포가 많은 극동에 보내어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유사시에는 훈련받은 군인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둔전병을 지휘할 장교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미국 독립전쟁 때 농사짓다가 나팔 소리가 나면 집에 가서 총을 가지고 나와 영국군과 싸워 독립을 쟁취한 미국 민병대 미니트맨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첫 여름 학기 생도들은 모두 13명이었습니다. 14세의 김용성부터 50세가 넘은 조진찬까지 여러 연령층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한편 한인소년병학교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커니시에서 20km 정도 떨어진 헤이스팅스대학에서 기숙사와 학교 시설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1910년 4월 헤이스팅스대학 내로 이전한 한인소년병학교는 그해 6월 두 번째로 개교했습니다. 당시 링컨, 커니 지역에 살던 유일한, 정양필 등을 비롯해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오하이오, 미시건, 뉴욕, 펜실베이니아, 일리노이 등지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자원 입학해 생도는 전년보다 배가 많은 26명이었습니다.
역사학자 김도훈 교수에 따르면 한인소년병학교의 교과 과정은 미국의 근대식 군사훈련과 군사고등학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한인소년병학교의 일과는 오전에는 노동, 그리고 오후에는 군사훈련과 학습, 저녁에는 자습 등으로 이어졌는데요. 미주 한인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이는 상당히 고된 일과였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미주 한인사 전문가 안형주 씨] “그들은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9시 30분에 취침하는 15시간 30분 군영 생활로 오전에는 5시간 농장에서 일하고 가장 무더운 오후에 군사훈련을 하고 오후에 학급에 따라 2시간 학습을 하는 고된 일과였습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6년째인 1914년 6월 16일에 20명의 학생이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한인소년병학교의 마지막 학기였습니다.
1914년 여름 샌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관의 직원 이누이는 네브래스카주에서 순회 연설을 다니던 중, 이 지역 한인 유학생들이 일본 총독부 타도 계획을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헤이스팅스에서 3일간 조사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헤이스팅스대학에서 무관 학교가 열린다는 말을 들은 이누이는 근처 한인 학생들을 만나 실상을 파악한 뒤 헤이스팅스대학 학장에게 항의했습니다.이에 헤이스팅스대학 측이 한인소년병학교에 더 이상 시설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미주 한인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당시 이런 결정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미주 한인사 전문가 안형주 씨] “당시 세계열강의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은 강국끼리 경쟁을 벌이면서도 약소국 식민지화는 합리화하는 상부상조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묵인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점령을 묵인하였던 것입니다.”
일본 영사관의 항의 외에도 1912년 한인소년병학교 설립자인 박용만이 하와이 신한국보 주필로 초빙되어 하와이로 떠난 것, 그리고 소년병학교를 후원하던 안재창 등 지역 한인들과 많은 지도교사가 다른 지역으로 떠난 것도 한인소년병학교가 문을 닫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가 쓴 저술인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에 따르면 한인소년병학교에는 6년간 170여 명의 학생이 등록했습니다. 이 가운데 중복된 생도가 90여 명이었고 졸업한 생도는 40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김도훈 교수는 한인소년병학교의 의의와 관련해 이 학교는 자치기관을 만들어 법에 의한 구속력을 가지고 둔전병식으로 군인을 훈련해 독립전쟁에 대비하고자 하는 박용만의 구상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평가합니다.
[녹취: 김도훈 한국교원대 교수] “그런데 이 한인소년병학교라는 게 의의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최초라고 할 수 있죠? 해외에서는. 우리가 그전에는 역사에서 배울 때는 1906년에 이상설 등이 간도 쪽에 서전서숙이란 것을 만들었다고 그 의의를 높게 평가하는데 그건 교육기관이고요. 이 경우는 물론 둔전병식 훈련제도라고 하는데 둔전병이라는 건 뭐냐면 우리가 나라가 없으니까 땅이 없잖아요? 둔전이라는 것은 묵은 땅이라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황무지를 개척해 가지고 우리가 경제적인 자립기간을 만들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하고. 이러한 형태를 말하는 거죠. 그래서 한인 최초의 한인군사학교라는 그런 의미가 있죠. 그런데 단지 좀 아쉬운 게 나중에 한인소년병학교가 박용만 선생이 하와이로 떠난 이후에 1914년경에 폐교되는 아쉬운 부분이 있죠. 그런데 이 학교 출신들이 나중에 보면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하고 또는 독립운동가로도 많이 활동을 해요. 그런 의미는 있습니다.”
미주 한인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자신의 저서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에서 한인소년병학교 출신들이 1920년부터 1960년까지 재미 한인사회의 중견 지도자로 활약했다고 밝혔습니다.
안형주 씨는 또 이들이 폐쇄된 미국 사회의 어려운 조건 아래에서도 각자가 거주하는 지역 한인사회에서 한인단체를 조직하거나 한인교회와 한국어학교들을 후원해 명실공히 지역 한인사회의 주역으로 부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박용만 세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