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여덟 번째 시간으로 1920년대부터 태평양전쟁기까지 서재필의 활동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서재필이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유일한과 함께 유한주식회사를 세웠던 1925년 무렵 미국의 태평양연구소가 주최하는 범태평양회의가 그해 7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됩니다.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김승태 소장은 이 회의가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제반 문제들을 토론하기 위한 민간 차원의 국제회의로 한국에서도 대표단이 참석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범태평양회의는 미국, 일본, 호주, 캐나다, 필리핀, 인도, 중국 등 태평양 연안 국가의 저명한 재야인사들이 모여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제반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한 민간 차원의 국제회의였습니다. 이 회의는 국내에도 알려져 YMCA 총무 신흥우가 이미 1925년 3월 초부터 준비하여 송진우, 김양수, 유억겸, 김종철 등과 함께 한인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서재필은 국민회와 시카고 한인 유학생들부터 이 회의에 한인대표 고문으로 참석해 줄 것을 요청받고 기꺼이 수락했는데요. 다시 김승태 소장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해외동포들은 이 회의를 일본의 학정과 한국의 상황을 태평양 연안 국가 국민들에게 알릴 좋은 기회로 보고 국민회와 시카고 한인 유학생들이 서재필에게 이 회의에 한인대표단의 고문으로 참석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서재필은 이를 흔쾌히 승낙하고 이 회의에 참석하여 한인 대표의 발표를 응원하고 회원 자격을 문제 삼는 일본 대표들의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오히려 신흥우가 일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범태평양회의 상임위원으로 당선됐으며 이 회의의 운영위원으로도 참여했습니다.”
필립제이슨 상회가 파산한 뒤 서재필은 60세가 넘은 늦은 나이에 펜실베이니아대학 의학부에 특별 학생으로 등록해 의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의학계로 복귀했던 것입니다.
서재필은 당시 상황을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모든 재미동포가 독립운동에 진력하게 되었는데 나도 3년 가까이 이 운동에 나의 시간과 재산을 모조리 바쳤다. 그리하여 나는 사실상 파산하고 말았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파산한 서재필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는데요. 다시 의학의 길로 들어서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낭독: 서재필] 무일푼이 된 나는 이제 가족의 부양을 위해서 다시 무슨 일이든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사업을 경영하려고 해도 자본이 없었다. 유일한 방도는 한번 더 의학을 연구하여 학문과 기술이 모두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하는 길이었다. 나는 펜실베이니아대학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2년간의 수련을 쌓았다. 그 2년이 지난 다음 나는 펜실베이니아 어느 병원에 취직이 되었다가 몇 년 후에 레딩에 있는 큰 병원으로 전임이 됐다.
서재필은 의학 재연수를 마쳤지만, 자금이 없어 병원을 개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병원에 취직하여 일하면서 병리학을 연구해 그 결과를 의학잡지에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1930년에서 1931년에는 필라델피아 서부 레딩에 있는 성요셉병원에서 병리학자로 근무했고, 1932년에는 찰스톤종합병원에 초빙돼 1934년 봄까지 병리학자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지나치게 과로했던 탓인지 1934년 봄 무렵 폐병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 미주와 한국에서는 서재필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서재필은 1936년부터 건강을 회복하고 개인 병원을 개업했고, 차차 의사로서의 명성을 회복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1941년 8월경 평생 반려자였던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서재필의 경제관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간 개인적인 파산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경제관에 변화가 생겼던 것인데요. 이와 관련해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 숙명여자대학교 이황직 교수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1890년대 1910년대 20년대까지 자유주의 우승열패, 사회진화론, 이런 게 지배하던 시기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서재필도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자유주의 경제관이 필요하다고 당연히 지지를 했었죠. 그런데 조국이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개인적으로 20년 동안 경영한 회사가 파산을 해서 자기도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고, 그러면서 당시 미국 경제가 1920년대 후반부터 위기에 빠지면서 결국 대공황으로 이어지고, 그러면서 자유자본주의의 거대한 실패를 보게 된 거죠. 그리고 서재필이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거기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통해서 국가가 개입을 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것을 봤습니다. 그걸 보게 되면서 국가의 역할이 필요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새로운 관점들도 마침내 서재필이 수용하게 됐습니다.”
실제로 서재필이 1935년 월간지 중앙에 기고한 글을 보며 이런 변화를 자세하게 볼 수 있는데요. 다시 이황직 교수의 설명입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실제로 1930년대에 중앙이라는 월간지에 기고한 글이 있는데요. 그걸 보면 서재필이 국가의 시장 규제를 정당화하기도 하고, 부의 불평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자본주의가 아무리 좋은 체제라고 해도 너무 불평등하면 혁명이나 반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기업들이 조금 노력해서 경제에 도덕과 자비라는 인간성의 관점도 필요하다는 것, 이런 것을 설득하는 그런 모습들이 보였던 것이죠. 기본적으로는 자유자본주의의 지지자이기는 하지만, 극단적인 시장의 실패 상황에서, 그리고 불평등이 심각한 상황에서는 국가가 개입하고 도덕이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황직 교수는 또 서재필이 이러한 변화한 경제 관념을 바탕으로 해방 이후 건국 도정의 한국민에게 공공적 가치와 이익 추구가 균형을 이루는 경제인의 이상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 영향을 받은 청년 유일한은 서재필의 신념을 실제 자신의 기업 경영에 반영하기도 했습니다.
1941년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격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러자 70세가 넘은 노인 서재필은 징병 검사관으로 자원하여 1942년 1월부터 1945년 4월까지 봉사했습니다.
종전까지 2천 명이 넘는 징집 병사를 진찰한 공로로 서재필은 1945년 1월 미국 국회 훈장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서재필은 일찍부터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해인 1941년 봄 의용보에 그는 ‘미국 국방운동에 우리 한인이 공헌할 바가 무엇인가’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미국 본토와 하와이 그외 미국 영지에 사는 동포들에게 필자가 간절히 부탁하는 바는 다만 미국을 칭찬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이 나라를 사랑하여서 각자 자기가 가진 재간대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이 나라에 사는 책임만 다 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미국이 우리 민족을 도와주려는 성의를 발하게 하는 큰 힘이 되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라고 그 혜택으로 우리 민족이 완전히 해방되리라고 깊이 믿습니다.
한편 서재필은 태평양전쟁 기간 이른바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는데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그러던 중 마침내 1941년 12월 7일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이듬해 초부터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주미외교위원부는 재미한인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미국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며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대규모 대회를 계획하였습니다.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3일간 열린 한인자유대회가 그것입니다. 이 대회는 주미외교위원부를 후원하는 한미협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으로 개최하였는데, 서재필도 이 대회에 참석하여 한미협력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였습니다.”
서재필은 이 대회의 폐회 연설도 담당하게 됐는데요. 그는 여기서 참석자들에게 이 전쟁에 최선을 다해서 협력할 것으로 호소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우리는 이제 미국과 세계를 위해서 싸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우리 미국은 우리의 임무를 완수해야만 하며 한국은 작은 나라이지만 이 전쟁에서 승전을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2천300만 한국 국민은 일본과 싸울 준비가 돼 있습니다. 여러분의 과제는 간단합니다. 여러분은 50년간 여러분의 말에 의지해온 여러분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를 도와주십시오. 그것은 여러분과 한국과 세계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서재필’ 여덟 번째 시간으로 1920년대부터 태평양전쟁기까지 서재필의 활동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